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초기 공산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19세기 중엽 공산당 선언이라는 작은 책자가 나왔는데, 초기 공산주의 사상은 노동자들이 너무 착취받고 있기 때문에 조만간 공산주의 혁명이 전 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생길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이 생기면 사유재산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정작 공산주의 사상을 개발한 사상가들은 부잣집 아들딸이라면서요?
란코프교수: 네 그렇습니다. 맑스 본인은 누구였을까요? 유대인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인데 은행을 경영했습니다. 앵겔스는 큰 공장 여러 개를 가진 자본가입니다. 레닌의 아버지는 제정 러시아에서 고급 관리였습니다. 트로츠키도 지주의 아들입니다. 사실상 유명한 공산주의 이론가와 정치인들 가운데 진짜 어렵게 사는 농민이나 노동자 집안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해도 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도 부잣집에서 태어난 혁명가들은 사회의 모순과 끔찍한 현실을 열심히 연구하고, 어렵게 사는 민중들을 도와 줄 의무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민중을 도와줄 방법이 바로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역사가 잘 보여주듯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 사실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19세기말이나 20세기 초 공산주의 이론의 매력은 너무 크고, 지식인들도 백성들도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습니다.
기자: 맑스는 1840-50년대 세계 어디에서나 공산주의 혁명이 곧 생기고 수십 년 이내에, 즉 19세기 말까지 세계가 공산주의 낙원이 될 줄 알았는데요. 하지만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 어디서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맑스가 이 문제에 대해서 설명한 적이 있나요?
란코프교수: 없습니다. 맑스는 1883년에 영국에서 사망했는데, 공산주의 혁명이 아직까지 생기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 들어와 공산주의 운동에서 최초의 갈등이 생겼습니다. 이 갈등을 초래한 것은 맑스의 다른 주장에 대한 의심입니다. 맑스는 앞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그들은 마침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870-80년대 선진국 어디에서나 노동자들의 소득과 생활 수준은 빠른 속도로 향상되고 있었습니다. 맑스 시대의 영국 노동자들은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노동자들의 자녀들은 1880-90년대에 집도 자전거도 있었고, 그 자녀들은 학교를 무료로 다녔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이 아시는 지 모르지만, 심지어 연금 제도까지 등장했습니다. 세계는 맑스의 주장과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확실했습니다. 이 사실을 본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조금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 운동과 사회민주주의 운동은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사회민주주의는 무엇인가요?
란코프교수: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이론가들은 원래 공산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 그들은 맑스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예측하지 못했던 현상 두 가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첫째로 노동자들의 생활과 소득수준은 하락하는 대신에 상승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원래 투표권도 없던 노동자들은 선거에 참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정당과 기타 정치단체들은 국회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운동 이론가들은 여전히 돈도 없고 민족도 없고 계급도 없는 아름다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필요를 인정했지만, 그 목적지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 의심이 생겼습니다. 혁명이 아니어도 공산주의 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앞으로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서 노동자들은 불가피하게 인구의 다수가 되고, 그들은 투표권이 있으므로 국회도, 다른 국가기관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무장 혁명이 없어도 노동계급 세력은 국가를 장악하고, 단계적으로 아름다운 공산주의 사회를 실시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자: 사회민주주의 운동가들은 공산주의 혁명이 곧 생길 것이라는 맑스의 주장을 부정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다른 목표를 가지게 됐나요?
란코프교수: 나중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첫 단계서는 아닙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회민주주의 운동가들은 여전히 공산주의 사상을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맑스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믿었던 목적에 대한 의심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기자: 사회민주주의 운동가들은 나중에 어떤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나요?
란코프교수: 나중에 사회민주주의 운동가들은 공산당이 아니라 사회당, 사민당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갈수록 맑스가 희망했던 미래가 가능할 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물론 사회당은 1940년대 말, 즉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 여전히 공산주의 건설을 자신의 목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이 최종 목적지에 대한 열망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1940-50년대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목적은 돈도 없고, 민족도 국가도, 애국심도 경찰도 없는 이상적인 공산주의 지상낙원을 만드는 대신에,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현대국가를 잘 관리하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누구든지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지금 세계적으로 인기가 제일 많은 사회 대부분은 사민당이나 사회당이 꿈꾸던 세상과 비슷합니다. 좋은 사례는 1930년대 초 이후의 스웨덴입니다. 1930년대 초 이후 스웨덴에서 사민당은 사실상 계속 집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희망하는 사회는 문제점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말하면 성공적이었습니다.
기자: 그런데 사회민주주의가 등장했을 때, 공산주의를 여전히 열심히 믿는 운동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란코프교수: 120년 전, 즉 1900년을 전후하여 공산주의 이론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 가운데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위험한 수정주의나 개혁주의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 대부분은 제정러시아처럼 투표도 없는 절대군주제 국가 출신들이었습니다. 핵심 이론은 1870년에 제정러시아 시대 고위 관리의 집안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레닌입니다. 그를 비롯한 공산주의자 일부는 여전히 폭력혁명을 굳게 믿고, 혁명을 곧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초기 공산주의가 다음 단계로 가는 길을 열어준 사람들입니다.
기자: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