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소련보다 훨씬 더 비참한 역사, 공산주의 성공 전혀 없어
- 당과 수령의 위대성 강조한 대약진운동, 대재앙 초래해
- 중국의 집단화 농업정책, 농업 근간 무너뜨리며 기근 불러와
- 오늘날 중국 공산당, 대약진운동 실패 언급조차 싫어해
지난 시간까지 구소련의 공산주의 역사를 살펴봤습니다. 구소련의 공산주의는 한때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나름대로 정치개혁도 시행했지만, 결국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요. 오늘 이 시간부터는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중국 공산주의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교수님, 저희가 지난 몇 주 동안 소련과 동구라파의 공산당 역사를 살펴봤는데요.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공산국가인 중국은 어떨까요? 중국 공산주의 역사는 소련 공산주의 역사만큼 비극과 공산이 많은 역사인가요?
[란코프 교수] 네, 소련보다 훨씬 더 비참한 역사입니다. 굶어 죽은 사람도 너무 많고, 숙청과 체포를 겪으며 옥사하거나 처형된 사람도 훨씬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 시대 공산주의 역사는 많은 고생과 숙청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을 이루고 인민 생활도 많이 좋아졌지만, 중국 공산주의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상황이 좋아지기 시작한 때는 바로 중국의 권력계층이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했을 때부터입니다. 당연히 1980년대부터 중국은 말로만 공산주의 국가였습니다. 1949년부터 1980년대 초까지 중국이 공산주의 정책을 폈을 때 소련보다 고생이 훨씬 더 많았지만, 소련에서 볼 수 있었던 공산주의 성공은 아예 없었습니다. - 중국 공산주의 역사에서 제일 비참한 역사는 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데, 맞나요?
[란코프 교수]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문화대혁명 당시 고생하거나 피살된 계층은 압도적으로 권력과 힘이 있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모르는 일반 백성이 많이 죽었던 시기는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 시기가 아니라,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있었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시기입니다. 당시 기근 때문에 굶어 죽은 농민의 숫자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대략 최소 2천 만에서 최대 3천만 명입니다.
- 그럼 대약진운동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대약진운동은 모택동(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공 지도자들의 자부심이 너무 커서 생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949년에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때 중국은 아직 세계기준으로 매우 어렵게 사는 나라였습니다. 모택동은 중국을 소련보다 더 발전된 나라로 만들 수 있으며, 세계 사회주의 진영의 지도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평생 유격대 생활을 했고, 혁명가와 군인의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명령의 힘을 굳게 믿었습니다. 모택동과 중국의 최고 간부들은 명령만 제대로 하고, 인민 대중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면서 당과 수령의 위대성을 믿게 할 수 있다면, 인민들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 장사나 개인경제가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공장이나 대기업뿐 아니라 농업까지 완전히 국가의 소유로 만들면, 역사상 유례없는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택동은 7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15년 안에 미국을 추월한다고 말했습니다.
- 듣기 좋은 말로 들리는데요. 그런데 그들은 계획도 하지 않고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나요?
[란코프 교수]네, 그렇습니다. 모택동 주석과 공산당 지도부는 시끄럽게 선전만 하면, 사람들을 미친 기계처럼 일하게 만들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물론 결과는 중국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 교수님, 집단화라고 하는데요. 당시의 농업정책은 1930년대 스탈린의 소련에서 벌어진 집단화와 비슷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1950년대 말 중국에서 인민공사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민공사는 소련의 콜호스, 즉 협동농장과 비슷하지만, 국가 소유가 훨씬 더 많습니다. 개인재산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1957-58년에 인민공사 대부분은 농민들이 뙈기밭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집에서 요리도 할 수도 없게 됐습니다. 모든 음식은 공용식당에서 같이 요리하고, 같이 먹어야 합니다. 그릇, 수저까지 모두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말로는 국가 소유가 아니라 인민공사의 소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침부터 국가 소유가 된 농기구를 쓰면서 일하고, 국가 소유 식당에서 밥을 먹었습니다. 그들의 개인소유는 이불 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 교수님, 모든 것이 국가 소유였는데요. 농민들이 과연 열심히 일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청취자 여러분도, 노 기자님도 잘 알고 계십니다. 당연히 잘 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을 잘 하는 사람이든, 게으른 사람이든 같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고 책임감 있게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았을까요? 모택동은 선전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환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농민들은 결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으니까 간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충분했습니다. 간부가 매우 어리석은 명령을 내려도 농민들은 그 명령에 따라서만 일했습니다. 결국, 인민공사 운동이 시작된 이후 1958년에 기근이 시작됐습니다. 중국 농업이 무너져 버린 겁니다.
-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모택동과 그 측근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처음에 기근이 시작되었을 때 이 사실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지방 간부들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수확 통계를 매우 과장해서 보고했습니다. 결국, 1958-59년에 북경 정부는 수확량이 없어 기근을 겪는 지역에도 막대한 곡식을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 그렇다면 교수님, 중국 공산당에는 양심이 있고 솔직한 간부들은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있었습니다. 특히 이때는 아직 혁명 이념을 굳게 믿는 사람이 있었던 시대입니다. 이같은 정책을 가장 시끄럽게 반대한 사람은 1950년대 초 한국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최고사령관을 지냈던 팽덕회입니다. 그는 농민 출신이었는데, 고향에 갔을 때 굶어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는 모택동을 비롯한 고급간부들 앞에서 인민공사 정책을 비판하고, 정책을 바꾸도록 요구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팽덕회는 즉시 철직되었습니다. 몇 년 후 체포돼 감옥에서 고생을 많이 했고 결국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사자들이 2천만 명 이상 생기자, 자신의 환상 속에 빠져있던 모택동도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인민공사를 해체하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어느 정도 개인소유를 인정받았고, 국가에 바치는 할당량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 공산당은 대약진시대의 농업정책에 대해 언급하기도 싫어합니다. 매우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중국 모택동 시대의 공산주의는 사상과 자부심만 컸지, 현실 생활은 이에 크게 미치지 못했군요. 당시 중국의 공산주의는 농업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국민의 생활을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으면서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이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최대 실패작이 된 것이군요. 다음 시간에도 중국 공산주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