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등소평, 사실상 공산주의를 포기한 인물
- 대기근 이후 중국을 부활시킬 방법으로 시장경제 선택
- 중국 간부들, 자본주의 선택한 국가가 잘 산다는 것 알아
- 쥐 못 잡는 붉은 고양이(공산주의) 버리고, 흰 고양이(자본주의) 키우기로 결심
- 등소평, 시장경제 지지와 함께 민주화 운동 탄압
지난 시간 중국 모택동 시대의 공산주의를 되돌아봤습니다. 당시 모택동의 공산주의는 사상과 자부심만 컸지, 현실 생활은 이에 크게 미치지 못했고요. 농업을 완전히 무너뜨린 데다 국민의 생활을 비탄에 빠지게 했는데요.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이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최대 실패작이 됐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등소평 시대를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교수님께서 중국 공산주의 역사를 보면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보다 민중들에게 훨씬 더 큰 고통을 줬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도 드디어 끝난 것 같은데요.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중국만큼 빨리 성장한 나라가 없지 않습니까? 이 성장을 불러온 것이 바로 '개혁과 개방' 정책인데요. 이 정책의 창시자가 바로 등소평입니다. 등소평은 왜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개혁개방을 시작했나요?
[란코프 교수] 물론 등소평은 사실상 중국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등소평은 죽을 때까지 자본주의가 아닌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개발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 쓸모있는 거짓말에 불과했습니다. 등소평의 세계관을 제일 잘 대표하는 것은 '흑묘백묘론'입니다.
- '흑묘백묘론'을 우리말로 하면, '까만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다'라는 말이지요?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 이 말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등소평이 '흑묘백묘론'을 처음 언급한 시기는 대약진운동 직후 중국 경제의 재건을 책임졌을 때인 1960년대 초입니다. 등소평은 처음부터 같은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어떤 추상적인 사상보다, 중국을 강대국으로 만들고 특히 중국 민중이 잘 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원래 공산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바로 공산주의가 중국의 경제성장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초래한 기근, 그리고 문화대혁명을 비롯한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의 미친(실패한?) 정책을 본 등소평은, 조용히 공산주의에 대한 착각을 버렸습니다. 그 후 등소평은 중국을 부활시킬 방법으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현대식 시장경제'를 확신하게 됐습니다.
- 그런데 등소평은 원래부터 중국 공산당에서 힘이 많은 간부로 지내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등소평이 중국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가 아니었다면, 모택동 사망 이후 나라의 노선을 바꾸지 못했을 겁니다. 등소평은 1904년 중국 서남부 사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1920년대 초 프랑스로 유학을 갔는데, 그곳에서 공산주의를 배웠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죽을 때까지 프랑스 음식, 특히 프랑스식 아침 식사의 빵을 매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후 모스크바에서 유학했고, 1920년대 말부터 모택동, 주은래와 같이 많은 혁명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 중국공산당이 승리했을 때, 등소평은 중국 수뇌부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 이것을 보면, 등소평은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고 공산주의를 믿은 사람이 아닐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그랬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등소평도 수많은 중국 공산당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목적보다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강대국을 건설하고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방법으로 여겼습니다. 이 때문에 1950년대에 시행한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살인적인 실험을 했을 때, 등소평은 많이 반대했습니다. 결국, 1960년대 말 문화대혁명 때 등소평은 숙청되었습니다. 다행히 죽지 않고 4년 동안 지방에서 육체노동을 하다 다시 복직되었는데, 얼마 후 다시 숙청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국 간부들 가운데 등소평은 현실주의의 살아있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 모택동이 사망한 이후 등소평이 권력을 장악해 새로운 노선을 추진했을 때, 많은 간부의 지원을 받았는데요. 공산당의 고급 간부들은 왜 등소평이 주장한 사실상 자본주의 노선을 지지했나요?
[란코프 교수] 제일 중요한 이유는 세계에 대한 지식의 확산입니다. 1960-70년대 중국의 인민대중은 해외 생활을 알 방법조차 없었지만, 고급 간부들은 세계의 흐름을 잘 알았습니다. 그들은 동아시아에서 놀라울 정도로 빨리 성장하는 나라들은 남조선(한국)과 대만처럼 자본주의 경제를 선택한 나라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당시에 자본주의의 길로 선택한 나라들은, 공산주의 실험을 한 나라들보다 경제가 훨씬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남조선, 대만과 같은 나라들은 빠른 속도로 잘 사는 중진국이 되어갔습니다.
- 등소평과 공산당 간부들은 남조선과 대만 같은 나라들을 보며 어떤 결론을 내렸나요?
[란코프 교수] '공산주의로 알려진 붉은 고양이는 쥐를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능한 고양이를 쫓아내고, 쥐를 잡을 줄 아는 백색 고양이, 즉 자본주의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심했습니다.
- 하지만 등소평이 개혁개방을 시작했을 때에도, '공산주의를 포기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라고만 주장했는데, 왜 그런가요?
[란코프 교수] 물론 등소평식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사실상 자본주의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등소평은 경제발전을 불러오기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을 때에도 국내안전의 유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소평과 그 측근들이 자신의 개인 권력과 특권을 위해서 국내 안정, 즉 정권의 안정이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또 등소평과 다른 고급간부들의 가족들은 모두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등소평 본인은 죽을 때까지 매우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를 위해서 안정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문화대혁명이나 대약진운동과 같은 혼란을 경험한 등소평은, 안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등소평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라고 주장한 것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는 국가 사상이 하루아침에 바뀐다면 일반 평범한 사람들이 매우 혼란스러워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당이 사상을 포기할 경우, 나라를 다스릴 정당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 등소평은 시장경제를 촉진하는 동시에 체제를 반대하는 세력, 특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생각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등소평의 명령에 따라, 중국 군대와 경찰은 민주화를 요구한 청년∙학생과 노동자들을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따라서 등소평은 경제발전을 추진했지만, 독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등소평은 청년학생들을 학살하는 것이 국내 안전을 지키고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불가피한 필요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판결은 역사가 내릴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함께 강대국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바로 개혁개방 정책이 있었습니다. 개혁개방정책으로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군사력도 강화했고,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북한에도 중국식 개혁개방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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