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공산주의 체제와 고려인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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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1937년에 소련정부는 17만명의 고려사람, 즉 조선 교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는데요, 이 같은 강제 이주가 고려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란코프 교수: 지난 시간에 설명 드린 것처럼, 1930년대 소련에서 고려사람들만큼 공산당정권에 대해 충성심이 많은 소수민족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갑자기 이와 같은 강제이동은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조건이 매우 열악해서 아주 많은 어린이와 노인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또한, 고려사람들은 그 후에 공식적으로 심한 차별을 받았습니다.

전: 조금 전에 고려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차별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소련은 민족차별이 없는 나라라고 스스로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민족차별이 없다는 주장은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공식 입장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소수민족 대부분은 차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의심스러운 소수민족들도 있었는데, 고려사람들은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 때문에 1930년대 말부터 53년 스딸린사망 때까지 공식적인 차별대상이었습니다. 이 차별은 비공개 규칙이나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제일 중요한 차별은 고려사람들은 중앙아시아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학 입학도, 취업도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전: 그렇다면 고려사람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입학할 수도 없고, 레닌그라드에서 취직할 수도 없었다는 것인가요?

란코프: 대체로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복잡한 사정입니다. 차별대상이 모든 고려사람들이었다기 보다는, 1937년까지 연해주와 원동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강제이주 대상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1937년에 러시아 원동지역이 아니라 서방지역에서 살았던 고려사람들은 강제이동 대상도 아니었고, 차별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스딸린 시대에도 소련 학교를 다니던 고려사람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7년에 원동 밖에 살았던 사람들은 많아도 7-8%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려사람 거의가 원동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당국자들의 허락을 받은 다음에 중앙아시아를 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전기자님은 북조선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노래 휘파람을 아나요?

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남한에 있는 탈북민들이 자주 부르는 노래 아닙니까? "어제 밤에도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벌써 몇 달 째 불었네 휘파람 휘파람…"

근데 이 노래가 고려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란코프: 휘파람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조기천 이란 고려사람입니다. 북한 자료를 보면,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서 외국에서 살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거짓말입니다. 저는 조기천의 가족들을 잘 알고, 그의 개인 자료까지 많이 읽었습니다. 그 사람은 1945년 말까지 조선땅을 본 적도 없습니다. 조기천은 처음에 연해주에서 살았고, 그 후 옴스크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강제이주 된 다음에 모스크바에서 인기가 높은 고리키문학대학을 입학했습니다.

전: 고려사람들은 중앙아시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조기천은 모스크바로 갈 수 있었나요?

란코프: 규칙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입학 후 며칠 만에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었습니다. 바로 당국자들의 허가 없이 중앙아시아를 벗어나 모스크바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를 도와 준 고려사람 출신 간부들이 있어서, 조기천은 석방되고 다시 강제적으로 중앙아시아로 가야 했습니다. 당시에 조기천은 소련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에 실망을 아주 많이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나중에 다시 한번 사상이 많이 바뀌었고, 1940년대 말에는 공산주의체제를 다시 많이 찬양했습니다.

전: 조기천을 도와 준 고려사람 출신 간부들이 모스크바에서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고려사람들이 차별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간부직까지 오를 수 있었나요?

란코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스딸린 시대 차별을 당하고 강제이동을 당했던 소수민족들은 고려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 도이췰란트계, 크림 타타르족 등 10개 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사람들은 약간 예외적인 상황입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중앙아시아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간부가 될 수도 있었고, 출세도 어느 정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때 고려사람들은 보통 군대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매우 어려운 조건 하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소수의 고려사람들은 군관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고려사람들은 전쟁 때에도 군대로 안 갔습니다.

전: 그밖의 분야에서 강제이주가 고려사람들의 생활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게 있습니까?

란코프: 처음에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주로 벼농사를 잘 짓고, 10-15년 이내에 매우 열심히 일하는 고려사람 노동자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제일 잘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1937년 강제이동 때까지 고려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자기끼리만 살았습니다. 강제이동 이후 고려사람들은 다른 소수민족과 섞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결국 젊은 사람들은 조선말보다 러시아 말을 많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교육을 노어로 해야 한다고 제일 많이 주장한 사람들은 바로 고려사람 학부모들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나중에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대학교라면 무조건 러시아말로 시험을 쳐야 하고, 러시아말로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는 그 전에 고려사람들은 자기끼리만 결혼했는데, 강제이동 이후에는 기타민족들과의 결혼이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전: 고려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얼마나 오래 지속됐나요?

란코프: 공식적인 차별은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에 사라졌습니다. 그 때부터 고려사람들은 국내에서 어디로나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차별은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특히 국가비밀과 관계가 있는 직업이면, 고려사람을 의심스럽게 보았기 때문에 그 직업을 얻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50년대 말부터 고려사람들은 돈도 잘 벌고 교육을 잘 받고, 대체로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조선말에 대해서 관심이 작아졌고, 현 단계에서 그들의 문화나 생활습관은 러시아 사람들과 많이 비슷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전: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교수님, 다음 얘기가 또 고대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