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국가의 양대 산맥 중국과 소련의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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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소련과 중국, 동맹 관계 40년 중 30년은 갈등 관계

- 갈등 원인은 국가이익의 충돌 탓

- 중국 "미국보다 소련이 더 큰 위협"

- 중소갈등의 교훈 "국제관계에서 사상이 중요한 것 아냐"


1969년 중국 병사들이 말을 타고 소련과 분쟁 중인 국경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1969년 중국 병사들이 말을 타고 소련과 분쟁 중인 국경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ASSOCIATED PRESS)

지난 시간에는 중국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살펴봤습니다. 오늘날 중국이 미국과 함께 강대국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바로 개혁개방 정책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나눠봤는데요. 오늘은 공산국가의 양대 산맥이었던 중국과 소련의 분쟁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교수님, 원래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국과 소련이라는 두 개의 중요한 국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소련과 중국 관계가 언제, 그리고 왜 나빠지기 시작했나요?

[란코프 교수] 중국에서 1949년에 공산당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1989년에 공산권은 무너졌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간판을 내걸고 있는데, 사실상 극한 자본주의 국가가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중국과 소련이 함께 강대국으로 지내온 시기는 40년입니다. 40년 동안 그들이 동맹 관계를 유지해 온 시기는 12년에서 13년에 불과합니다. 남은 30년 동안은 서로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관계가 좋지 않다기보다 서로 매우 미워하고, 사실상 서로 제일 위험한 적대 국가로 생각했습니다. 1970-80년대 중국 입장에서 보면 소련은 미국보다 훨씬 나쁩니다. 또 소련 입장에서 보면 중국이 미국보다 훨씬 나쁜 나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대와 중국군대는 1960년대 말에 서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 시대의 소련은 미국과 공개적으로 싸운 적이 없지만, 중국과는 공개적으로 싸웠습니다.

- 왜 그랬을까요? 중소분쟁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학자에 따라 그 질문의 대답이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택동과 흐루쇼프 서기장, 그리고 브레즈네프 서기장의 개인 성격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소련 공산당과 중국 공산당의 사상 대립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사상대립도 있었고, 개인 문제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두 강대국 사이에 국가이익의 충돌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소련도 중국도 자신이 사회주의 진영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중국에서 공산당 혁명이 생긴 지 10년이 지난 1959년에 중소분쟁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데, 교수님께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기본 이유는 무엇일까요?

[란코프 교수] 중국의 모택동은 처음부터 소련 공산당에 대해 불신감이 컸습니다. 그는 스탈린을 극찬했을 때에도 스탈린을 거의 믿지 않았습니다. 모택동은 스탈린을 공산주의자보다 러시아의 이익밖에 모르는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스탈린은 모택동이 공산주의자보다 소련을 등에 업고, 소련을 교활하게 조종하려는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소련과 중국의 불신감이 없지 않았음에도 서로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흐루쇼프 서기장은 스탈린 우상화를 비난하고, 국내에서도 주민들에 대한 단속과 진압, 언론과 문화, 문학에 대한 검열을 많이 완화했습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보면 이 자유화는 수정주의였습니다. 모택동의 입장에서, 소련 인민들을 많이 죽일 마음이 없는 흐루쇼프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유격 활동과 지하혁명 활동을 해온 모택동은, 젊었을 때부터 간부로 살아왔던 흐루쇼프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마 제일 중요한 것은, 중국이 소련에 도전하고 사회주의 진영의 지도국가가 되는 것... 이것이 모택동의 꿈이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소련과 중국은 언제부터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나요?

[란코프 교수] 1950년대 말부터입니다. 소련은 원래 비공개적으로 중국의 대약진운동에 대해 경제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모험주의라고 평가했고, 이 사실을 중국 지도부에게 알려줬습니다. 이것을 들은 중국 지도부는, 자신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소련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것입니다. 지금 중국 지도부도 대약진운동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원래 양측은 비공개적으로 서로 비판했는데, 1960년을 전후해 소련의 프라우다 신문과 중국 인민일보는 서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갈수록 공격의 강도가 강해졌습니다. 특히 중국은 소련에 대해 사회주의를 배신한 수정주의 국가라고 비난했는데, 특히 흐루쇼프 서기장 개인에 대한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흐루쇼프는 당연히 화가 났는데, 그는 중국에 많이 파견돼 있던 소련 기술자들과 많은 전문가를 철수시켰습니다. 당시에 중국의 기술 수준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소련 기술자들이 철수하자, 모택동과 중국지도부는 더 큰 소리로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4년, 흐루쇼프는 소련공산당 내부의 종파 싸움 때문에 강제퇴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중소무역은 거의 중단되었고 유학생들도 강제로 귀국을 당했습니다.

- 당시에 중국은, 소련을 미국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생각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정말 그렇습니까?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중국언론은 소련이 미국보다 더 위험한 국가라고 했습니다. 수정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정책을 펴는 국가라고 했습니다. 중국 인민들은 소련의 수정 주의자들과 싸워야 하며,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국경 지역에서 충돌이 가끔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 중소관계가 많이 나빠져서 무력충돌까지 생겼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일인가요?

[란코프 교수] 1969년에 소련과 중국 국경인 아무르강에 있는 작은 섬 때문에 무력충돌이 생겼습니다. 당시 수백 명의 전사자까지 발생했습니다.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또 하나의 큰 무력충돌이 있었고, 수십 명의 전사자가 생겼습니다.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소문에 따르면 소련은 당시 중국이 다시 한번 국경분쟁을 일으키면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검토했습니다.

- 그렇다면 소련과 중국이 모두 싫어했고, 세계 제국주의의 우두머리 국가라고 생각한 미국에 대한 태도는 어떻습니까?

[란코프 교수] 1970년대 초부터, 중국 공산당은 미국과 관계를 많이 개선했습니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소련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거의 15년 동안 중국과 미국은 사실상 동맹 관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우리가 중소대립의 역사를 보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제가 보니까 제일 중요한 교훈은, 국제관계에서 사상이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원래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민족주의의 힘을 몰랐고, 공산주의 국가라면 가까운 관계와 상호협력, 원조의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이었습니다. 사실상 거의 20년 동안 제일 큰 두 공산주의 국가는 서로를 제일 위험한 적국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본이유는 국가이익의 충돌과 민족주의였습니다.

네. 공산주의 사상을 공유했던 소련과 중국이 오랜 세월 갈등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또 사상보다는 실질적인 국가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다시 깨닫게 되는데요.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