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개혁개방의 첫걸음, ‘농업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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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중국 개혁개방의 첫 단계는 토지개혁, 새로운 농업구조 도입

- 북한식 협동농장인 인민공사에 대한 실망 커

- 시골 농민들이 개인 농사 시작, 인민공사에 바친 뒤 남은 것 소유

- 농업개혁으로 생산량 증가, 누구나 배불리 먹고살게 돼

- 변화를 이끈 가장 큰 힘은 잘 살고 싶다는 농민의 열망


중국 모택동 시대의 공산주의는 농업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국민의 생활을 파탄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개혁과 개방'정책을 펼쳤는데요. 그 개혁개방의 첫걸음이 바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농업개혁이었습니다. 오늘은 중국의 농업개혁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1980년대 중국은 사실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경제를 포기하고 자본주의 경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발전을 이뤘는데요. 고생이 많았던 중국 사람들은 1970년대와 비교해 놀라울 정도로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란코프 교수] 중국 개혁개방의 첫 단계는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비합리적인 사회주의식 농업체제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농업 구조를 도입했던 겁니다. 농업개혁의 성공은 모든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등소평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1970년대 말 들어와 국가가 직접 경영했던 인민공사에 대한 실망이 컸습니다.

인민공사란 무엇일까요? 북한식으로 말하면 큰 협동농장입니다. 원래 사회주의진영 국가들은 1930년대 소련의 농업집단화를 모방했습니다. 1930년대 초 소련에서는 모든 농민을 콜호스로 알려진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말로는 농민들의 협동농장인데, 사실상 국가 소유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후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소련의 콜호스를 모방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인민공사'라고 부르고, 북한에서는 '협동농장'으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농업 집단화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공산주의식 협동농장이나 콜호스, 즉 국가 소유 농장은 왜 실패했나요?

[란코프 교수] 이유는 간단합니다. 협동농장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일 뿐 아니라, 농업의 특성에도 맞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점은, 농민들이 열심히 일해도 얻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협동농장이든 인민농장이든 자기 땅이 아니라 남의 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한편, 농업에서는 밭의 특징을 잘 알아야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간부들은 멀고 먼 협동농장 토지의 특성도 알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농민들은 열심히 일 할 필요도 없었고, 자원도 아껴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 그렇다면 중국은 언제부터 농업개혁을 시작했나요?

[란코프 교수] 모택동이 사망한 직후 중국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중국 남서부의 사천성, 중남부의 안휘성의 시골 농민들이 개인 농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인민공사 간부들과 비공개적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농민들이 어느 정도 농산물을 인민공사에 바치면, 남는 것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당시에는 비합법적인 행위였는데, 이를 본 등소평과 간부들은 이 약속을 인정하고 환영했습니다. 또 1978년부터는 농가를 중심으로 한 농업구조를 도입해도 된다는 지시도 내려졌습니다. 중국말로 '가정연산승포책임제'라고 하는데, 우리는 간단히 '농가책임제'라고 부르겠습니다.

- 교수님, 농업개혁의 결과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쉽게 말하면 처음부터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농가책임제가 실시되는 지역에서 농산물 생산이 전례없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198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사실상 농가책임제를 의무화했습니다. 1983-84년까지 중국에서 인민공사가 다 사라졌고, 농민들은 자신을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1984년, 중국에서 쌀과 알곡을 비롯한 농산물의 생산량은 1978년 수준보다 140%나 많았습니다. 5-6년 만에 농업생산이 40%나 급증했습니다. 중국의 수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평범한 인민들은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의 농업역사에서 전례가 거의 없는 성공입니다.

- 교수님, 중국 농민들은 열심히 일했는데요. 그래도 이만큼 큰 성공을 거둔 이유가 또 있나요?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농가책임제의 도입 외에는 다른 변화가 거의 없던 시대입니다. 경지면적은 오히려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뜨락또르와 같은 농기계의 수준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변화는 비료 생산이 많이 증가한 것뿐입니다. 또 국가는 농산물을 구매할 때의 가격을 어느 정도 인상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결정적인 변화는 아니었습니다. 변화를 초래한 가장 큰 이유는 갈수록 높아지는 농민들의 열망뿐이었습니다.

- 교수님, 그 이후에도 중국 농업이 이만큼 빠르게 성장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게으르게 일했던 농민들이 자신의 능력대로 열심히 일하게 되면, 그 결과가 짧은 기간 안에 크게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은 당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생산량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계, 새로운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 말부터 중국 농산물의 생산량은 80년대 초처럼 빠르게 증가하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농업생산량을 늘리는 핵심 요인은 중국의 공업 발전으로 가능해진 농기계들입니다.

또 농가책임제 덕분에 공업발전을 위한 유리한 조건이 마련됐습니다. 농가책임제의 도입으로 중국 공산당은 돈을 거의 쓰지 않고도 기적과 같은 식량 증산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중국 통치자들이 해결하지 못했던 식량문제를 몇 년 만에 해결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중국 농민들은 자신의 땅이 생겼기 때문에 큰 성공을 이뤘다고 볼 수 있나요?

[란코프 교수]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중국 농민들이 농가책임제로 받은 땅은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여전히 국가 소유입니다. 1980년대 초 농업개혁이 시작됐을 때, 그들은 소유권 대신 사용권을 받았습니다. 원래 사용권의 기간은 7년이었고, 나중에 15년, 그리고 1993년 이후에는 30년까지 연장됐습니다.

그 30년 동안 공산당이든 중국 정부이든 누구도 농민들의 땅을 뺐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농민들의 땅을 국가가 빼앗는 일은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중국 공산당 간부 중에 농민들에게 사용권이 아닌 소유권을 주자는 말도 많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도시에서는 2017년부터 사실상 건물과 땅에 대한 소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따라서 농업에서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 북한도 중국을 모방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란코프 교수] 그렇습니다. 다행히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북한도 1980년대 초의 중국과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물론 중국만큼 강력하게 추진하지 않아서 결과가 중국만큼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식량 상황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공산당 또는 국가소유인 집단농장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고, 농민들이 개인적으로 경영하는 농장은 어디에서나 결과가 좋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네. 오늘은 중국 개혁개방의 첫걸음인 농업개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