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체제하의 이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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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에 1940년대 말 이후 해외로 떠난 소련 공민들이 거의 50여만명이고,
90%가 합법적으로 갔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불법적으로 간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 사람들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제가 확실한 통계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1940년대 후반 이후에 비합법적으로 외국으로 간 사람들은 수만 명 정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전에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1940년대 후반 이전까지 비법적으로 해외로 간 소련공민은 700-800만명 정도였습니다.

전: 정말 많은 사람들이 떠났군요. 왜 그렇게 많은 소련사람들이 고향 땅을 버리고 외국으로 떠났을까요?

란코프: 첫째로, 혁명 이후 많이 갔습니다. 공산당이 승리한 이후 공산주의가 싫은 사람들이 많이 떠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0년대초 2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혼란 속에서 소련체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손쉽게 해외로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말 들어와 국경경비가 많이 엄격해지고, 국내감시도 심해져서 외국으로 떠나기가 쉽지 않아졌습니다.

전: 지난 시간에 스딸린의 딸조차 소련을 떠나 해외에 가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외국으로 떠난 사람 중에 또 다른 유명 인사가 있나요?

란코프: 아마 시대별로 살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20년대 말 이전에 해외로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왜냐면 당시에는 누구나 쉽게 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학자, 작가, 예술가 등 많은 유명 무명의 인사들이 소련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20년대 말에 들어와서는 소련에서 나가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위험을 무릎 쓰고 도망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아마 제일 처음에 해외로 도망친 유명인사로는 바로 1928년에 이란과 인도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망명한 ‘보리스 바자노프’일 겁니다. 그는 당시에 스딸린 서기장의 개인비서였습니다. 바자노프는 공산주의를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말부터 스딸린이 10월 혁명 지도자들을 간첩 죄목으로 마구 체포하는 것을 보고, 바자노프는 스딸린이 혁명을 배신한 독재자라고 판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도 곧 숙청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도망쳤습니다. 그 후에 1930년대 말에 스딸린의 숙청이 극에 달했을 때, 해외로 도망친 외교관과 보위원이 많았습니다.

전: 당시 외국으로 탈출한 유명 인사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란코프: 아주 많았습니다. 당시에 유럽에서 첩보활동 담당자 몇 명이 도망쳤습니다. 그들 가운데 당시 에스빠냐 공화국에서 NKVD의 지부장이었던 오를로프도 망명했습니다. 북한 식으로 말하면, 정찰국이나 보위성의 중국이나 동남아 작전담당자와 같은 수준입니다. 주불가리아 대사 라스콜니코브도 망명했습니다. 그는 1917년 혁명 때 혁명세력의 선봉대였던 발틱 함대의 혁명해병의 지도자였습니다.

전: 그럼 소련에서 도망친 인사들은 외국에 이주해 소련 반체제 민주 운동을 했나요?

란코프: 그렇지 않습니다. 도망친 사람들 대부분은 여전히 공산주의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빨간 사상이 강했습니다. 그들에게 스딸린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재자였다기보다는 10월혁명과 공산주의를 배신한 수정주의자이자 기회주의자였습니다. 또는 공산주의사상을 왜곡한 파렴치한 종파분자였습니다. 그 망명자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공산주의 독재를 위해서는 살인도 할 수 있고, 자기 목숨을 바칠 수도 있는 극단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전: 그렇다면 망명자들은 공산주의 원칙론 자들이었고 그걸 지키기 위해 조국을 탈출한 것으로 들리는데요.

란코프: 그렇지 않습니다. 1930년대 대숙청 당시 어떤 간부들은 아무 때나 체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서, 살아남기 위해서 해외로 도망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친듯이 노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조금 전에 말씀 드린 소련 보위원이나 외교관들은 망명한 다음에도 소련 국가기밀을 다른 나라에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겐리크 루스코프라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조선역사에서도 악명이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루스코프가 조선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란코프: 그는 NKVD의 간부, 북조선 식으로 말하면 고위급 보위원 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에 소련 연해주에 도착했습니다. 그의 기본 목적은 당시에 교포, 즉 고려사람들의 강제 이동 준비였습니다. 다른 목적은 고려사람 출신의 지식인, 간부, 군관들을 많이 숙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스코프는 진짜 열심히 했습니다. 당시에 고려사람 교수이든 군관이든 공산당 간부이든 적어도 4분의 3 정도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거의 다 옥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루스코프는 악명 높은 ‘고려인 강제이주’를 지휘했습니다. 그런데 루스코프는 양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머리는 있었습니다. 1938년에 들어와 스딸린이 보위원 숙청을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루스코프는 이것을 예측하고, 도망쳤습니다. 사실상 일본 식민지와 다를 바가 없는 만주국으로 갔습니다.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자신이 아는 모든 비밀정보를 넘겼습니다. 소련 관련 정보뿐만 아니라, 조선 혁명운동과 중국혁명운동 정보도 모두 다 알려주었습니다. 1936-37년에 그와 같이 고려사람 지식인과 간부 숙청을 주도했던 보위원 대부분은 1938-39년에 소련 감옥에서 죽었지만, 루스코프는 1945년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곧 패전하게 될 것임을 알아 차린 일본인들은 루스코프를 죽여버렸습니다.

전: 루스코프 이후에 망명한 소련의 유명인사들이 있었나요?

란코프: 1941년에 파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소련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에 독일세력에 협력한 소련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진짜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지식인들 가운데서 당시에 망명할 기회가 많았지만 망명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면 당시 소련에서 당간부들 가운데 공산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도이췰란드 파쇼들을 훨씬 더 심하게 싫어했습니다. 해외로 간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서민들입니다. 몇 명의 예외가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로 유명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외적 사례를 든다면 유명한 의학 교수 겸 서양장기 체스 선수가 있는데, 그는 독일군대가 소련에서 철수할 때 그들과 함께 독일로 떠났습니다. 흥미롭게도 독일로 넘어간 소련 군인들이 지식인이나 간부들보다 더 많았습니다. 제2차 대전 때 이름이 난 인사들 중에 독일 쪽으로 넘어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