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사회주의 국가 사이에서 갈등과 대립, 무력 충돌 잦아
- 유고슬라비아, 스탈린이 통치한 소련과 적대관계
- 소련과 중국, 알바니아와 중국 사이도 나빠
- 사이 나빴던 유고와 북한, 훗날 좋은 관계로 발전
흔히 같은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사상을 공유한 국가들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는데요. 오늘은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과 대립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우리가 공산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수십 년 동안 존재했던 공산권 국가들은 자신들을 사회주의 진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국가는 자신의 연대성을 많이 강조했는데요. 실제로 그들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말과 행동이 사뭇 달랐습니다. 공산주의 사상가, 이론가들은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했을 때부터 공산당이 통치하는 나라라면 무조건 다른 공산국가와 형제적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아주 다릅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역사에는 갈등과 대립, 무력 충돌까지 많았습니다.
-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언제부터 갈등이 시작됐나요?
[란코프 교수] 사실상 사회주의 진영은 1940년대 말 제2차 대전 직후에 탄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이 탄생하자마자 매우 심한 갈등이 생겼습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핵심세력에 제일 처음 도전한 나라는 유고슬라비아입니다. 대부분 동구라파의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은 1940년대에 소련군대에 의해 파쇼 독일로부터 해방됐습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좀 다릅니다. 소련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싸웠지만, 유고 공산당은 처음부터 인기가 높았고 산간지역에서 파쇼 독일과 열심히 싸웠습니다. 사실상 공산당 유격대는 소련 군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에서 권력을 장악한 찌또 위원장은 튼튼한 권력 기반이 있어서 처음부터 스탈린의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찌또 위원장은 스탈린을 어느 정도 비판했는데, 유고가 소련의 정치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갈수록 소련과 유고의 관계는 악화했습니다. 결국 1948년부터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관계는 적대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스탈린은 찌또를 배신자라고 선포했고, 심지어 미국의 간첩이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반면 찌또 위원장은 스탈린이 충실한 공산주의자들을 마구 죽이는 미친 독재자라고 비난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최근 공개된 역사 자료를 보면, 스탈린은 찌또를 암살하기 위해 공작원들을 훈련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당연히 찌또에 반대해 유고슬라비아에서 망명한 사람들은 소련과 기타 동구라파 국가에서 반정부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 찌또와 스탈린은 열심히 싸웠는데요.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직후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그러나 유고는 이후에도 소련의 정치 압박을 많이 무시했습니다. 찌또는 쁠럭불가담 운동의 핵심 지도자들 중의 하나가 됐습니다. 이 때문에 유고는 여전히 소련과 별로 가깝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중립국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아의 사회주의 체제는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와 비슷하지 않은 특징도 많이 있었습니다.
- 북한과 유고는 원래 어떤 관계였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1960-70년대 유고와 북한의 관계는 비교적 가까웠습니다. 예를 들면 찌또는 1977년에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김일성도 1975년에 유고를 방문했습니다. 이것은 조금 역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시작했을 때, 유고는 이것이 소련과 북한에 의해서 시작한 전쟁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습니다. 당시에 유고슬라비아 언론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전쟁에 대한 책임은 소련의 스탈린과 북한의 김일성에게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에서 기억력이 약한 것도 좋은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바뀌면 쓸모있는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유고와 북한은 옛날 일을 잊어버린 척하고 가까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에 도전한 첫 번째 공산권 국가인데요. 다른 국가들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1950년대 말에 들어와 소련과 중국 사이가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전에 이 주제에 자세하게 말했기 때문에 오늘 자세히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당연히 중소대립은 사회주의 진영 역사에서 제일 심한 충돌이었습니다. 1960년대 초 중소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하자, 중국은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두 번째 사회주의 진영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이같은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짧은 기간이나마 중국을 지지하는 몇 개의 사회주의 진영 나라가 생겼습니다.
- 중국을 지지한 나라들은 어떤 나라들인가요?
[란코프 교수] 북한과 윁남(베트남)도 1960년대 초 어느 정도 친중국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인 1970년대 말에 베트남은 중국과 전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이것은 여전히 멀고 먼 미래였습니다. 당시 북윁남은 중국의 정치 노선을 지지했고, 소련에서 많이 멀어졌습니다. 당시에 대표적인 친 중국 나라는 알바니아입니다. 1960년대 알바니아 정부는 중국과 손을 잡았고, 소련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주의 진영 국가와 대립했습니다. 당연히 당시 알바니아 지도자였던 호자는 중국과 북한을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이 수정주의라고 주장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알바니아는 외국과의 관계를 거의 다 차단했고, 진짜 고립된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 교수님, 알바니아는 아주 이상해 보이는데요. 그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었나요?
[란코프 교수] 1970년대 들어와 알바니아 지도자인 호자는 중국 모택동 주석과 관계가 많이 나빠졌고, 자신이 유일하고 참된 공산주의 지도자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자는 중국도 수정주의 국가라며 마구 비난했습니다. 그는 자신만이 공산주의 진실을 잘 아는 유일한 사상가라고 주장했습니다.
- 교수님, 사회주의 진영에서 대립뿐만 아니라 암살 공작까지 있다고 하셨습니다. 무력충돌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1960년대 초 중국과 소련은 관계가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과 중국 사이에 무력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규모가 작았습니다. 규모가 훨씬 더 큰 충돌은 1979년 중국과 윁남의 전쟁입니다. 당시에 윁남은 소련과 동맹 관계를 맺었고, 중국과 많이 대립했을 뿐 아니라, 캄보쟈(캄보디아)에서 친중국 정권을 타도했습니다. 1979년 중국과 윁남의 전쟁은 사회주의 국가 간 역사상 최초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통계는 없는데, 사상자가 약 6만 명 정도 생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 저와 같은 소련의 젊은이들은 이것이 제1차 사회주의 전쟁이라고 농담을 했는데, 이것은 농담이 아닌 농담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네. 오늘은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과 대립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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