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의 망명자/이민자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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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에 소련 망명자, 이민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소련시대 사회주의 진영 국가가 10여개 됐는데요. 이들 국가는 자기나라 공민들이 해외로 이주하는데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

란코프: 대체로 말하면 공산주의국가들은 자기나라 공민들이 해외로 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랬습니다.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은 자기 나라에서 완벽한 사회를 벌써 건설했고, 지상의 지옥과 같은 자본주의나라로 갈 사람들이 있을 수조차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해외로 가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생기자, 당국자들은 불만이 많이 생기고, 그들의 사상활동은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일이 없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우리가 194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동유럽 역사를 보면, 공산주의 국가들 떠나서 해외로 간 사람은 거의 700-800만명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동구권 인구가 별로 많지 않았을 텐데요, 700-800만 명이나 해외로 갔다면 큰 타격을 받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특히 동독, 동도이췰란드가 그렇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하겠습니다. 1961년까지 동도이췰란드 인구의 5분의 1이 서독, 서도이췰란드로 탈출하거나 이주했습니다. 물론 동독은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해외로 간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대량 강제 출국사건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대규모 망명 사건도 있었습니다. 셋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해외로 합법적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전: 해외 이주를 부정적으로 봤다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어떻게 자기 공민들을 강제 출국시켰다는 말씀인가요?

란코프: 그것은 주로 제2차대전 이후 생긴 민족청소 사건들입니다. 즉, 주류 민족이 위험하게 생각했던 소수민족들이 강제출국 당한 사건입니다. 동구라파에서 이와 같은 강제출국 정책을 했던 공산당 정권은 4개 있었습니다. 1940-50년대에 뽈스카와 체코는 이들 두 나라에 살아 왔던 도이췰란드계 사람들을 모두 다 강제적으로 출국시켰습니다. 이 두나라의 공산당은 국제주의를 여전히 운운하고 있었고, 동도이췰란드를 형제국가라고 주장했지만, 체코나 뽈스카는 자기나라에서 독일사람이 한 명도 있으면 안 된다는 태도였습니다. 당시에 강제적으로 출국 당해서 사실상 아무것도 없이 독일로 간 사람들은 400만명 이상입니다. 같은 무렵에 루마니아에서도 독일계 소수민족은 강제출국 당했습니다. 뽈스카나 체코만큼 강제출국 당한 독일계 사람들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조건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추방 독일인 들은 적어도 가방 몇 개를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이렇게 강제적으로 출국 당한 독일사람들은 30만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강제출국 희생자들이 된 소수민족은 독일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1950년대부터, 특히 1970년대에 불가리아는 이 나라에서 수백년 전부터 살아왔던 뛰르끼예(터키) 소수민족들을 강제로 출국시켰습니다. 그 수는 30만명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불가리아에서는 일제시대의 조선반도에서 창씨개명과 같은 정책까지 있었습니다. 불가리아에 있는 소수민족들은 불가리아식 이름을 짓고, 불가리아 말만 써야 하고, 소수민족들의 문화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감옥으로 가거나, 강제출국 당했습니다.

전: 원래 국제주의를 주장했다는 공산주의자들이 왜 이런 극한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폈을까요?

란코프: 불가리아 공산당도 여전히 국제주의를 큰 소리로 운운했습니다. 당연히 말뿐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세계 어디에나 정권을 잡은 다음에 민족주의 경향이 너무 심합니다. 소련당국은 불가리아를 가치가 있는 동맹국가로 보았기 때문에 이 같은 행태에 불만이 없지 않았습니다. 제가 70년대 불가리아의 이와 같은 정책을 매우 조심스럽게 비판하는 소련 언론의 글을 읽은 것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비판적인 글 조차 민족주의 정책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전: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해외로 떠난 사람들 가운데는 강제출국이 아닌 합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사람들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해당 국가들 공산당의 주장이 다른 나라는 지옥과 같다고 하고 자기 나라는 천국과 같다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각국 인민들이 스스로 고국땅을 등졌을까요?

란코프: 자기 나라 인민들이 합법적으로 떠날 수 있게 했던 정책을 허용한 나라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다른 공산국가들과 분위기가 조금 다른 유고슬라비아입니다. 1960년대 초부터 80년대말까지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나라로 갔습니다. 여기서 독일은 당연히 자본주의 도이췰란드, 서독을 말하는 겁니다. 당시에 해외로 노동하러 간 사람들이 150만명 정도입니다. 귀국하지 않고 서독에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10만명 정도입니다. 흥미롭게도 서독 당국자들은 유고슬라비아 출신 사람들을 쉽게 망명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 국가 출신자라면 누구든지 망명을 신청하면 거의 즉시 망명이 허용됐습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서독사람과 결혼한 유고출신 노동자들은 서독국적을 받고, 귀국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북조선은 해외로 노동자들을 많이 파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외로 간 북한노동자들은 감시를 많이 받고 있으며 어느 정도 자유가 허용될 경우에도 자기 수입의 절반이상을 계획분으로 당국에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서독으로 간 유고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혼자서 자유롭게 어디든지 갈 수 있었고, 돈은 국가에 바치는 대신에 마음대로 가족들에게 송금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에 독일로 간 유고슬라비아 노동자들 상황과 지금 해외로 파견된 북한노동자들의 처지는 굉장히 다릅니다.

전: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한 사람들은 또 다른 상황이었을 것 같은데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동유럽국가의 지리, 지형 등을 감안하면 망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산주의국가들은 국경감시를 철저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마다 진짜 많은 망명자들이 생겼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동구라파 나라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망명할 계기가 생길 때마다 이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기회가 생긴 것은 세 번 뿐입니다.

전: 어떤 나라였고 언제 그런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그 첫 번째는 1956년에 인민봉기가 생긴 웽그리아 (헝가리)입니다. 두 번째는 1961년까지 거의 완벽한 출국자유가 있었던 동독의 경우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1968년의 체코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 시간으로 미루겠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