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딸린 시대의 인기 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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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어느 사회이든 인기가 있는 직업도 있고, 인기가 없는 직업도 있습니다. 직업의 인기는 문화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잘 살수 있는 직업은 인기가 많습니다. 구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국가들은 자기 나라가 노동자와 농민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주장했는데요. 그렇다면 노동자나 농민이 그들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둘 다 좋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선전 자료에서 이러한 주장이 가끔 있었는데, 이 주장은 실제 상황과 아무 관계가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노동자들은 소련사회에서 제일 밑바닥에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농민은 노동자보다 더 밑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예외가 있었는데, 예를 들어 1917년 혁명직후에 노동자 출신이면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른 사회계층보다 높았습니다. 당시에 노동자출신이면 간부가 되기도 쉬웠고,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노동자 출신들은 소련이 무너졌을 때까지 약간 특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특권이 무엇일까요? 부모님이 노동자였던 사람은 노동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노동자 가정의 아들딸로서 각자 능력과 의지가 있다면 그들의 부모처럼 노동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조건을 제공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제대로 쓰지 못한 사람들은 노동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구소련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에 대한 무시는 북한만큼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을 인기 직업이라고 보는 사람은 나라 전체에 아예 없었습니다.

전: 하지만 소련 당국은 자기 나라가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주장하지 않았나요?

란코프: 이것은 공산주의사상과 직결된 것입니다. 1917년에 소련에서 정권을 잡은 공산당은 정말 노동자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만들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당연히 그들의 사고방식이 바뀌었습니다. 초기에 공산당 간부 중에 노동자 출신자가 비교적 많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간부가 된 다음에 그들의 생활양식은 당연히 노동자들의 생활양식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부들은 당시에 소련 노동자 대부분이 꿈에서도 꿀 수 없을 만큼 잘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 출신 간부들의 아들딸들은 대를 이어 간부가 되거나 지식인, 아니면 다른 특권계층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소련에서 북조선과 달리 토대라는 제도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간부 집 아들딸들은 간부나 지식인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습니다.

전: 그렇다면 소련에서 인기 있는 직업은 어떤 직업이었나요?

란코프: 시대별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딸린 시대 소련하고, 스딸린 사망 이후의 소련하고 큰 차이가 있습니다. 스딸린 시대에 인기가 제일 많았던 사람들은 간부들, 보위원들 그리고 군관들이었습니다. 당시에 그들은 국가에서 지원을 잘 받고, 여러가지 특권을 많이 즐길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소련에서 당비서이든 대위이든 일반인들보다 소득이 몇 배나 많고,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물질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딸린 시대 인기가 많은 직업 중에는 지식인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소련에서 지식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많지 않았는데, 돈을 잘 벌었고, 좋은 집을 국가에서 잘 받았고, 대체로 잘 살았습니다.

전: 그렇다면 스딸린 시대에 인민들이 피하고 싶은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란코프: 당연히 농민입니다. 농민들은 자신의 생활이 너무 싫어서, 아무 때나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것을 가로막기 위해 1930년대초부터 당국자들은 농민들이 여행통행증 없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북한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소련에서는 국내에서 자유롭게 여행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농민들뿐이었습니다. 50년대말까지 그랬습니다. 노동자이든 간부이든 기술자이든 마음만 먹으면 국내 어디든지 단기여행으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농민들만 여행통행증이 필요했습니다. 농민들이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있었다면, 수많은 경우에 도시로 떠나서 노동자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당시에 노동자 생활도 매우 어려웠지만, 농민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전: 그러면 농민들이 자유롭게 이주할 방법이 전혀 없었단 말인가요?

란코프: 방법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대학교를 입학하려는 젊은 농민집 아들딸은 도시를 찾아서 입학시험에 합격한다면, 도시에서 체류할 권리를 받았습니다. 물론 시험을 치기 위해서 무조건 먼저 여행통행증을 받아야 되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조건으로 특별한 약속을 하는 경우입니다. 도시로 가고 싶은 농민들은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멀고먼 시베리아의 위험한 광산이나 벌목장에서 5년정도 일한다면, 계약기간이 끝난 다음에 고향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에서 노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 조금 전에 스딸린 시대에 당 간부들이나 군관들이 잘 살았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이들은 1930년대 말 스딸린의 대숙청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그렇습니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거나 감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사람들은 1930년대 초 숙청이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숙청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간부나 군관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매력이 너무 많았습니다. 특별공급을 잘 받았고, 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 당시 지식인 직업도 인기가 많았다고 하셨는데요, 역시 대우가 좋았기 때문이겠지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딸린 시대 구소련에서 대학교교수나 대기업, 큰 공장의 기술자들은 공산당 간부나 보위원과 거의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스딸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빠른 경제성장이 제일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신기술을 배우고 개발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련 지도자들은 소련과학의 성공은 매우 힘센 선전도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사회주의의 위대성을 소련과학이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당국자들은 지식인을 우대했습니다. 물론 당시에 지식인이 많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교육수준이 높은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