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의 역사 (2)

0:00 / 0:00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교수님, 지난 시간에 미국에서 반공 우익 인사의 대표인 닉슨 대통령이 중국과 관계 개선을 계획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1950년대 초부터 중국과 미국은 서로 많이 비난했고 적대관계였지만, 60년대 말부터 관계 개선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기본 이유는 소련에 반대하는 목적입니다. 마침내 1971년 10월, 닉슨대통령의 안보 보좌관 키신저 박사는 비밀리에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파키스탄을 방문한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는 베이징으로 갔습니다. 베이징에서 키신저 박사는 중국에서 외교를 담당한 주은래 총리 그리고 모택동과 만났습니다.

기자: 키신저박사와 중국 지도부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양측은 관계를 정상화하고, 중국경제에 미국이 돈을 투자하고, 같이 소련에 반대하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키신저 박사의 중국 방문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첫 걸음 뿐인데요. 다음해인 72년에 닉슨 대통령은 중국으로 갔습니다. 닉슨은 모택동과 기타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고, 양측이 가까운 관계를 맺으면 좋다고 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그런데 대만이 있지 않습니까? 미국측은 대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인가요?

란코프 교수: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미국은 1949년이후에 국민당정권, 즉 중화민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북경에 미국 대사관이 없습니다. 대사관은 대만에 있습니다. 당시에 대만은 세계적으로 제일 빨리 성장하는 경제를 가진 나라입니다. 원래 부정부패로 악명높았던 국민당은, 흥미롭게도 대만으로 도망친 다음에 놀라울 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들은 청렴하고 유능한 집단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대만은 작은 나라여서 중국에 비하면 전략적인 가치도 경제적 가치도 많지 않았습니다.

기자: 대만측은 닉슨의 중국 방문에 화를 많이 냈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그렇습니다. 대만측은 불만을 많이 표시했지만, 약소국이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닉슨의 방중 이후 미국이 북경에 대사관을 설치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1979년에 미국은 중국과 수교를 결정했습니다. 미국측은 대만에게 이 소식을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했습니다. 새벽 2시에 이 소식을 들은 대만 총통 장경국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방법이 없었습니다.

기자: 미국측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대만을 버린 것 같은데요.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미국은 여전히 대만에 군사지원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또 미국 의회는 대만을 도와주는 법률도 만들었습니다. 대사관이 없어졌지만, 대사관과 기능이 거의 같은 대표부가 생겼습니다. 그래도 갈수록 대만의 의미도 역할도 작아졌고, 중국의 역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기자: 양측은 수교했습니다. 그 후에 미중관계가 어떨까요?

란코프 교수: 1978년 등소평이 중국에서 권력을 잡고 개혁개방을 한 다음에, 중국경제는 매우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경제는 사실상 자본주의 경제가 되었는데 미국은 중국에 많이 투자했습니다. 경제 협력도 많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미국 투자를 이 만큼 많이 유치하지 못했더라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을 지 의심스럽습니다. 미국측이 이러한 투자를 한 이유는 어느 정도 소련에 대한 압박의 목적도 있었는데, 기본 이유는 중국에서 막대한 이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자: 어떤 이익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중국 노동자들의 월급은 진짜 쌌습니다. 미국보다 수십 배 정도 싼데요. 하지만 그들은 슬기롭고 열심히 일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미국 회사들은 중국에서 공장을 많이 건설하고 매우 싼 값으로 여러가지 물건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미국의 돈 없이 어려웠습니다.

기자: 1980년대 양측은 경제적으로 협력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벌써 말씀드린 것처럼 양측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사 협력이 어느정도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친소련 정권과 싸우기 위해서 미국과 중국이 협력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당시에 소련은 1979년에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미국도 중국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간 것은 전략적인 위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측은 아프가니스탄의 반소 반공 세력을 열심히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1980년대에도 중국을 다스리는 세력이 여전히 중국공산당입니다. 그들은 어째서 반공세력을 도와주나요?

란코프 교수: 이미 설명드렸듯이 사상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중국 사상 일꾼들은 좋은 이유를 개발했습니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 공산당은 가짜이고 수정주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주장은 무엇일까요? 중국과 협력하는 공산당은 진보적이며 좋은 세력이며, 소련과 협력하는 공산당은 제국주의자보다 더 악독한 수정주의자 세력입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정권은 무너지고 반공세력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기자: 시대는 벌써 1980년대 후반입니다. 당시에 소련과 동구권이 심하게 흔들리고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는데요. 중국은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 중국에서는 천안문 민주화 운동의 불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5월 천안문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과 노동자 거의 100만명이 시위를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이 운동을 폭동이라고 규정하고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강제로 진압했습니다.

기자: 그러고 보니 얼마 전이 중국공산당이 천안문 시위를 땅크로 진압한 6월 4일이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미국과 반공 국가들은 중국공산당의 천안문 시위 진압에 어떻게 반응했나요?

란코프 교수: 처음에 화가 많이 났고, 중국공산당을 많이 비난했으며, 제재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1994-95년 즈음에 중국에 대한 입장은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기본 이유는 중국은 민주화 운동을 진압했지만, 경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입니다. 중국경제는 당시에 놀라울 만큼 고속성장 중이어서 외국사람들은 중국에 투자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2010년대 초까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중국 내부 정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협력하는 태도입니다.

기자: 하지만 오늘날 미중관계는 매일매일 나빠지고 있습니다.

란코프 교수: 기본 이유는 두 가지인데요. 첫째로 중국은 옛날보다 외국투자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은 강대국이 되었고 공격적인 외교와 군사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기술을 많이 훔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오늘날 미중관계는 다시 1950-60년대로 돌아가는 조짐까지 없지 않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