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딸린 사후의 인기 직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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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 시간에 스딸린시대 소련에서 인기직업과 인기 없는 직업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당시에 소련군대 군관들, 간부들, 보위원들이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하셨는데요. 스딸린이 사망한 후에도 그랬을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1953년 3월, 스딸린은 죽었습니다. 그 이후 소련사회에서 매우 깊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를 들면 스딸린시대 매우 심각했던 빈부격차가 많이 없어졌습니다. 스딸린시대 공산당 중급간부는 일반 농민보다 5-7배 더 잘살았습니다. 반대로 1960-70년대 들어와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수준이 많이 높아졌습니다. 물론 간부들은 여전히 민중보다 잘 살았지만, 스딸린시대보다 이 격차는 심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열심히 일하는 농민과 군당 지도원 정도의 간부의 생활수준 격차는 2-3배 였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스딸린 사망 이후 간부이든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인기가 많은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전: 간부직도 인기가 시들해 졌다는 말씀인가요?

란코프: 복잡한 문제입니다. 1960-70년대 소련에서 당 간부는 물론 인기가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1930-50년대초, 즉 스탈린 시대만큼 높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인기 직업이기는 하지만, 비교적으로 인기가 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기억하는 것은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우리 반의 한 여학생이 간부가 되고, 나중에 공산당 고급학교에 입학할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담당 선생님에게 알아봤습니다. 졸업한 지 5-7년 후에 생긴 일입니다. 담당선생님도, 그때까지 아직 관계가 있던 동창생들은 그 여학생에게 간부가 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간부는 약간 의심스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의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전: 그렇다면 어떤 직업이 인기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이 질문도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민중들은 소득이 높은 직업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그저 소득이 높다는 이유로 직업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면 일반사람들이 매우 높이 평가했던 직업은 상업과 관계가 있는 직업입니다. 상점판매원, 관리자, 지배인과 같은 사람들은 인기가 아주 많았습니다. 기본이유는 당연히 돈을 잘 벌 수 있었기 떄문입니다. 소련사회는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잘 살았습니다. 그래도 물건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 때문에 얻기 어려운 고급상품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보이지 않는 특권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판매원은 좋은 물건을 공식적으로 팔지 않고, 장마당에서 비싸게 팔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좋은 물건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식량상점 판매원이라면 고급 소고기를 선물로 주고, 그의 자가용 승용차는 수리소에서 즉각적으로 수리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관계가 매우 심각했습니다. 특히 상점 지배인, 백화점 지배인은 소득이 너무 높았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받은 돈은 90% 이상 불법 돈이었습니다. 여러가지 비리 방법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소련 사람들은, 상점지배인이나 판매원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전: 그러니까 상점 지배원이나 판매원처럼 거래에 관여하는 직업인들은 사회에서 대체로 무시를 당했다는 말씀인가요?

란코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외화벌이를 하는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무시 받지 않았습니다. 소련에서 외화벌이는 북한과 큰 차이가 있었는데, 소련에서는 북한처럼 전문 외화벌이 회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소련에서 해외출장으로 간 사람은 외국에 있었을 때 귀중한 외화를 많이 벌었습니다. 배를 타고 해외로 간 선원들도 비슷합니다. 그 사람들은 해외에서 돌아와서 집, 자가용 승용차, 여러 가지 가전제품 등을 합법적으로 살 수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감도, 무시도 별로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운이 좋으면 해외출장으로 갈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 스딸린 이후 시대의 지식인들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합니다. 스딸린시대 지식인들은 간부들과 대체로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란코프: 제가 벌써 말씀드린 바와 같이, 1960-70년대 소련은 스딸린시대에 비해서 매우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빈부격차가 없지는 않았지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960-70년대 객관적으로 말해서 지식인들이 즐길 수 있는 특권은 갈수록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말 교수의 생활비는 사회 평균 생활비보다 5배나 높았습니다. 거의 부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초에 교수의 월급은 별 변화가 없었고, 일반인들의 월급은 두배나 늘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갈수록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지식인들, 기술자, 학자, 교수들이 늘어날수록 그들에 대한 특권이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어느 시대이든 특권계층은 많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들어와 숙련노동자 대부분은 기술자나 일반 지식인보다 돈을 더 잘 벌게 되었습니다. 광부가 번 돈은, 핵무기를 개발하는 중급, 하급기술자 월급보다 조금 높았습니다. 그래도 벌써 말씀드린 바와 같이 노동자들은 돈을 잘 번다고 해도, 인기가 별로 없었습니다.

전: 사무직종 대우는 어땠을까요?

란코프: 대체로 말하면 하급지식인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대체로 말해서 1960-70년대 사무원들은 압도적으로 기술대학 출신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기술자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이 하는 일은 그냥 사무원입니다.

전: 1991년 말 소련 공산체제 붕괴 이후부터는 아무래도 직업의 선호도가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란코프: 많이 바뀌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판매원이나 지배인과 같았던 사람들, 즉 분배를 담당하던 사람들은 힘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소련시대 그 사람들이 힘이 많았던 이유는 만성적인 물건 부족 때문입니다. 당간부들은, 특히 젊은 간부 대부분은 공산주의 사상을 헌 옷처럼 벗어버리고, 사업가와 자본가들로 변신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90년대 과도기에 매우 어렵게 살았지만, 2000년대 들어와 살기가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외화를 벌 수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 특권이 있었지만, 옛날만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인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