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란코프 교수님, 얼마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여동생, 그러니깐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탈북자들을 "똥개" 또는 "쓰레기"라고 부르며 거칠게 비난했는데요. 공산주의 역사를 돌아보면 망명자들이 없지 않습니다. 과거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들도 김여정처럼 망명자들을 심하게 비난했던 적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그랬을 때도, 그렇지 않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시대별, 그리고 망명자별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1920년대초 공민전쟁에서 공산당이 이긴 다음에, 반공세력과 그 지지자들 수백만명이 해외로 도망갔습니다. 1920년대의 소련식 탈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그들은 공산정권이 짧으면 몇 년, 길어도 10년이내에 무너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망명자들은 반공 출판물을 많이 출판했고, 가끔 소련 국내에 침투해서 유격대 활동을 시작하려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노력은 다 실패로 끝나 버렸습니다. 당시에 제일 중요한 "1920년대 소련식 탈북자" 단체로 '러시아군인동맹'이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공산당과 싸우다가 패배하고 도망간 백군, 즉 반공군대 출신 사람들입니다.
기자: 언급하신 "1920년대 소련식 탈북자"들에 대해서 소련 당국은 어떻게 대처했나요? 혹시 레닌이나 스탈린은 같은 지도자가 직접 관영언론에 망명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썼던 경우도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어느 정도 그렇지만, 북한과 달리 "개똥"이나 "쓰레기"라는 말을 쓰진 않았습니다. 그냥 국제 반동세력의 선봉자, 반인민 세력 등 정치적 냄새가 많은 말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이들 단체는 외국 첩보기관에서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공개된 자료를 보면, 이들 소련 망명자들은 서방 첩보기관으로부터 놀라울 만큼 지원을 적게 받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방 첩보기관들은 소련 망명자들에게 별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소련 첩보기관은 "소련식 탈북자"들에 대한 암살시도도 했고, 핵심 인사 2명을 납치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말 들어와 백군 출신 및 그 단체들에 대한 태도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기자: 왜 그랬나요?
란코프 교수: 쉽게 말하자면 제2차대전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래 공산당을 반대했던 단체 대부분은 파쇼독일을 소련공산당보다 훨씬 더 싫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산주의국가이든 반공국가이든 러시아는 자신의 조국이며,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공산당정권과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는 반공세력 출신들은 임시적이라도 동맹세력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언론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많이 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당국은 망명자들의 귀국을 유도하기도 했습니다. 즉 원래 반공 인사였다고 해도, 소련으로 돌아온다면 국적을 받고 잘 살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기자: 말씀하신 시기는 스탈린 시대 소련인데요. 당시 소련당국은 그런 약속을 실제로 지켰을까요?
란코프 교수: 지킨 적도 있는데, 지키지 않은 적도 많습니다. 귀국자들은 소련에 돌아와 조용히 산다면 안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외국어능력이 뛰어나고 외국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1950년대부터는 출세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약간 의심스러운 대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외교관, 그리고 KGB 공작원까지 된 사람까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1940년대 소련으로 돌아온 이후에 많은 사람은 유배지나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특히 외국 생활에 대해서 많이 떠든 사람들은 유배지로 끌려갔습니다.
기자: 1945년 전쟁이 끝난 다음 소련당국의 망명자들에 대한 태도는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변화가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일반 망명자들과 정치활동을 하는 망명자들을 확실히 구분해야 합니다. 1940년대 이후, 공민전쟁때 패전한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졌고, 그들이 만든 단체들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새로운 망명자들이 만든 단체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옛날 1920년대 망명자들이 만든 단체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의 핵심 반공 반소 단체는 '민족노동동맹'입니다. 주로 1940년대 제2차대전 당시 혼란속에서 소련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만든 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공산정권이 몇 년 이내에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고, 유격대활동에 대해선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민족노동동맹은 주로 출판활동과 라디오 방송을 했습니다. 또 이번에는 서방 정보기관들과의 관계도 맺고 있었습니다.
기자: 교수님, 혹시 민족노동동맹도 소련에 삐라를 보내거나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50년대부터 특별히 장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큰 풍선을 만들고, 대소 삐라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60년대 초까지 약 10년동안 삐라 약 1억장을 살포했습니다. 그러나 이 삐라살포활동은 별 결과가 보이지 않았고 또 비용이 많이 들어서 결국 멈추게 됐습니다.
기자: 1950년대 흐루쇼프 시대 때 소련 관영언론과 공산당은 대소련 삐라나 민족노동동맹에 대해 많이 분노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민족노동동맹이 원래 파쇼독일과 협력했고, 오늘날 미국 간첩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았던 망명자들에 대해선 공격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소련 언론을 보면 소련을 떠나서 해외로 간 사람들은 큰 실수를 한 불쌍한 사람들, 어리석은 선택을 한 소박한 사람들이라고 주장되곤 했습니다. 그들이 원수들의 선전을 믿었기 대문에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주장되거나, 그 사람들 대부분이 지금 후회를 많이 느끼고 있다고 주장되기도 했습니다.
기자: 소련 관영언론의 망명자들에 대한 주장은 사실이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주로 거짓말입니다. 당시에1950-70년대 소련을 떠나 해외로 망명한 사람들은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소련공산당이나 소련체제를 매우 싫어했고 죽을때까지 적대적인 입장입니다. 하지만 소련 언론은 망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 망명자들은 많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그들을 불쌍한 희생자로 묘사했습니다.
기자: 소련 언론의 전략은 효과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그리 많았다고 할 순 없지만 조금은 있었습니다. 가끔 망명자들 가운데서 소련당국자나 소련 첩보기관에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을 포섭할 수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당국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망명자들 가운데서 정치활동을 피하고 민족노동동맹과 같은 반소련 단체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흐루쇼프나 브레즈네프 시대 서기장이나 고급 간부가 직접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통해 민족노동동맹과 같은 반소련 망명자 단체를 비난한 적은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없었습니다. 관영언론기자들은 망명자들을 비난했지만, 고급간부들은 직접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고급간부들이 망명자들을 간단하게 언급한 적은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망명자 단체가 서방 정보기관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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