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마르크스-엥겔스 시대부터 종교에 적대적 태도
- '종교는 인민의 아편'; 대부분 좌파 사상가는 종교 반대
- 1930년대 소련의 종교 탄압으로 옥사 또는 처형 만연
-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도 소련의 종교 탄압 모방
미국 국무부가 지난 5월에 발표한 '2017 연례 국제종교자유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특별 우려국에 지명됐습니다. 특히 8만 명에서 12만 명의 북한 주민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는데, 이중 상당수가 종교를 믿었다는 이유 때문으로 알려졌습니다. 공산주의의 역사를 보면 종교는 공산주의와 늘 적대적인 관계였는데요, 오늘은 소련과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탄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세계 어디에서나 공산주의는 종교와 매우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란코프 교수] 예외가 없지 않았지만, 대체로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시대부터 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즉, 종교는 무조건 위험한 마약이라는 겁니다. 이런 태도는 19세기 유럽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교회, 특히 로마 천주교회와 러시아 정교회는 매우 수구적이고 반동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민들, 특히 농민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많이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던 시대입니다. 이 입장에서 보면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했던 공산주의 사상가들에게 종교는 위험한 경쟁자였습니다. 당시에 종교가 농민과 서민들의 마음을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공산주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좌파 사상가들은 종교를 매우 반대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혁명 이후에 종교를 완전히 금지할 생각이었나요?
[란코프 교수]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공산주의 사상가들은 공산주의 국가가 매우 엄격한 독재 국가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종교를 힘으로 없애버리기보다는 선전과 선동, 그리고 사상교육 수단을 이용해 종교의 영향력을 파괴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다면 다른 미래를 꿈꾸던 사람들은 정말 권력을 잡은 이후에 종교탄압 정책을 시작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권력을 잡은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 정교를 매우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공산당은 신부나 목사 등 종교인들을 무조건 불순분자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정치와 연관이 있다면 체포하고 처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국가보위성과 비슷한 '체카'라는 기관이 있었는데, 케게베의 전신입니다. 그들은 종교단체에 많은 밀정을 파견했고, 반혁명 활동의 증거가 없더라도 의도적으로 그들을 자극해 많은 종교인을 체포하고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당국자들은 옛날 교회를 개조해 무신론 박물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1930년대 말 들어와 소련에서 종교가 많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 교수님, 1930년대 말 소련에서 종교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나요?
[란코프 교수] 큰 타격을 받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통계를 보면 1930년대 말까지 전체 러시아 정교의 신부들 중에 80%가 체포됐습니다. 그들 가운데 절대다수는 옥사하거나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말부터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은 정교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 스탈린과 공산당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쉽게 말하면, 스탈린은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 실망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스탈린은 갈수록 세계 혁명을 이루는 것보다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던 세계 혁명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이러한 혁명이 필요할지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겼습니다. 쉽게 말하면 스탈린은 초강대국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고, 다른 목적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초강대국을 건설하는데 가장 유력한 수단 중 하나는 '민족주의'입니다. 제가 볼 때, 인민의 아편은 종교보다 민족주의라고 말하면 정확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가 속한 민족의 우월성과 위대성을 좋아합니다.
- 교수님, 그런데 민족주의와 정교는 관계가 있지 않나요? 그래서 스탈린은 정교 탄압을 중지한 것 아닙니까?
[란코프 교수]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스탈린은 1930년대 말부터 종교에 대한 탄압을 많이 완화했습니다. 종교 탄압을 중지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데요. 1941년 파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러시아 교회는 당연히 공산당 정권을 싫어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독일 침략자와의 싸움을 많이 지지했습니다. 결국 1940년대 초부터 러시아에서는 신부들에 대한 숙청과 단속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소련 당국은 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였나요?
[란코프 교수] 역설적이지만, 스탈린보다 나라를 매우 자유롭게 만든 흐루쇼프는 종교를 많이 싫어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감옥으로 보낸 백만 명 이상의 무죄한 사람들을 석방했고, 통치 기간에 고문과 처형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 즉 흐루쇼프 시대에는 교회에 대한 압박이 크게 고조됐습니다. 신부들을 감옥으로 보낸 적은 거의 없지만, 스탈린 시대에 문을 열었던 교회의 문이 다시 닫혔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흐루쇼프의 퇴직 이후부터 소련 당국은 교회를 인내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소련 시대에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이런저런 종교 예식에 참가하면 문제가 됐나요?
[란코프 교수] 조금 복잡합니다. 간부들이나 당원들은 여전히 못 갔습니다. 단순히 관광객처럼 구경을 위해 교회에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예식을 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됐습니다. 하지만 간부가 아닌 일반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식인들도 갈 수 있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교회에 가지 못하고 종교 예식도 절대 하지 말아야 했던 사람들은, 공산당 간부 그리고 간부가 되고 싶은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련 시대에 학교에서는 여전히 반종교 교육을 조금 시행했으며 교회 활동에 대해서도 제한이 매우 많았습니다.
- 교수님, 지금까지 소련 이야기를 했는데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가 소련을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보다 종교에 대해 덜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폴란드(뽈스카)처럼 종교 세력이 큰 힘을 가진 나라들도 있었습니다. 예외는 북한과 알바니아입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60~70년대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고, 합법적인 종교 활동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 예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소련의 종교탄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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