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지난번에 스딸린이 먼저 트로츠키, 그 다음에 카메네프 등 자신보다 권력이 컸던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소련 최고권력자가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란코프 교수: 저번 시간에 설명 드린 것처럼, 스딸린은 트로츠키, 카메네프등 경쟁자들을 숙청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형장으로 보낼 능력이 아직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트로츠키는 숙청된 다음에 먼저 국내유배를 당했고, 1930년대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강제출국 당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트로츠키가 해외로 망명했다고 알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트로츠키는 소련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딸린은 그에게 출국비자를 발급했고, 강제로 소련에서 쫓아냈습니다. 원래 트로츠키는 레닌과 거의 비슷한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스딸린은 그를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처음부터 없애버릴 생각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1920년대 말까지 러시아공산주의혁명에서 두 번째 지도자로 여겨졌던 사람을 처형장으로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트로츠키는 해외로 쫓겨났고, 여러 나라를 떠돌았고 나중에 메히꼬로 갔는데, 계속 정치활동을 하였습니다.
전: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어떻게 정치활동을 했나요?
란코프: 트로츠키는 당연히 자신이 충실한 레닌주의자라고 생각했고, 스딸린은 끔찍한 수정주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스딸린 때문에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많이 왜곡되고, 노동계급의 사상에 따라 발전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소련이 위대한 나라라고 주장했습니다. 스딸린과 수정주의자들 때문에 왜곡되었지만, 조만간 올바른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해외에서 추종자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진보지식인들은 트로츠키에 열렬히 환호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지금도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작은 공산당은 몇 개의 서방 국가에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전: 스딸린으로서는 트로츠키의 해외 정치활동과 또 그의 인기가 눈엣가시였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란코프: 스딸린은 당연히 짜증이 많이 났고, 해외에서 사는 트로츠키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 말 소련공산당은 트로츠키를 혁명의 배신자라고 많이 비난했고, 소련 첩보기관은 트로츠키 암살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여러 번 시도했는데, 계속 실패했습니다. 결국 1940년 스페인 출신 소련 공작원 메르카도르는 드디어 트로츠키를 만났습니다. 원래 공작원은 자신이 열렬한 트로츠키주의자라고 주장했고, 결국 기회를 잡았고, 트로츠키를 만나러 연구실에 들어갔습니다. 메르카도르는 준비했던 얼음을 깨는 장비로 그를 암살했습니다. 당시에 연구실 바로 옆에 트로츠키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암살을 막지 못했습니다.
전: 물론 스딸린 소련 정권이 트로츠키 암살 배후였다는 걸 인정했을 리가 없겠지요?
란코프: 당시에 소련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자신들이 트로츠키의 암살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스딸린도 트로츠키 암살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스딸린은 그 공작원의 어머니에게 훈장을 주었습니다.
전: 트로츠키를 암살한 메르카도르 공작원은 어떻게 됐습니까?
란코프: 메르카도르는 체포되었을 때 자신이 소련 공작원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트로츠키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 때문에 트로츠키를 암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살인죄가 인정되고, 그는 20년동안 메히꼬에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1960년에 메르카도르는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으로 귀국했습니다.
전: 1960년이면 벌써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 아닙니까? 흐루쇼프 집권하에 스딸린주의는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트로츠키에 대한 평가는 바뀌었습니까?
란코프: 생각만큼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스딸린 시대 트로츠키는 혁명을 배신하고, 적대세력과 협력하고, 간첩활동과 파괴활동을 했다고 주장되었습니다. 1953년 스딸린의 사망 이후 소련선전일꾼들은 이만큼 웃기는 주장을 그만두었습니다. 하지만 트로츠키는 여전히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흐루쇼프 시대에도 브레즈네프 시대에도 트로츠키는 배신자나 간첩이 아니지만 매우 위험한 극좌익 분자, 모험주의자로 묘사되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기는 하지만, 아예 근거가 없는 주장이 아닙니다. 정말로 트로츠키는 매우 위험한 사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소련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비판이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를 암살한 공작원은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전: 암살 공작원 메르카도르가 메히꼬에서 형기를 마치고 1960년 소련으로 귀국했다고 하셨는데요, 귀국 후 그의 활동은 어땠습니까?
란코프: 메르카도르는 국가와 당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고, 아주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잘 수행했고, 그 후에 감옥에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련의 정치노선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인정을 받았습니다. 메르카도르는 소련으로 돌아간 다음에 국가 최고 훈장, 즉 금별훈장을 받았고 아주 좋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메르카도르는 당연히 남미상황, 언어 등을 잘 알아서, 나중에 쿠바혁명 이후에 쿠바에서 보위원 훈련 등에 참가했습니다.
전: 트로츠키가 암살된 이후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스딸린 시대는 오늘날 북한과 비슷한 부분이 없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숙청을 당한 고급간부이면 가족들도 체포되었습니다. 트로츠키는 세 번 결혼했습니다. 그의 첫 부인은 소련에서 계속 살았고, 대숙청이 시작된 다음인 1938년 체포되고 처형되었습니다. 둘째 부인은 1920년대 젊은 나이로 병사하였습니다.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그들도 1930년대에 처형되었습니다. 세번째 부인은 트로츠키와 같이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아들 두 명이 있었는데요. 한 명은 그들과 같이 해외로 갔을 때, 소련 첩보기관에 의해서 암살되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소련에서 남아있었고, 1937년에 체포되었고 처형되었습니다. 이것은 옛날 이조시대, 그리고 김일성시대 북한에서 볼 수 있었던 삼족을 멸하는 조치하고 비슷합니다. 그래도 트로츠키의 후손들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닙니다. 몇 명이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전: 트로츠키는 스딸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죽었습니다만, 만약에 거꾸로 그가 권력투쟁에서 이겨 최고 권력자가 됐었다면 소련이 대량학살이나 기근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란코프: 제가 보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트로츠키이든 스딸린이든 그들이 믿는 사상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트로츠키가 성공했다고 해도, 소련의 모습은 많이 바뀌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스딸린은 당연히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트로츠키가 쓴 책과 기사 등을 보면, 그가 희망했던 정책은 스딸린이 실시했던 정책과 차이가 별로 없습니다. 소련에서 테러와 경제문제가 생긴 것은 트로츠키가 패배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