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지난번에 우리는 1920년대 초 스딸린보다 힘과 권력이 더 많았던 트로츠키가 숙청당하고, 외국으로 쫓겨나고, 그곳에서 결국 소련 공작원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하셨는데요. 트로츠키 이외에도 1920년대 초에 스딸린보다 힘이 더 많았던 지노비예프를 비롯한 고급 간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제가 얼마 전에 그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 드린 적이 있습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그리고 부하린은 1920년대초 레닌이 사라진 이후, 소련국가와 공산당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스딸린은 당시에 그들 밑에 있었는데, 아직 지도자급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와 같은 사람들, 즉 나이가 많은 혁명가들은 매우 중요한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혁명운동은 잘 할 줄 알았는데, 혁명국가를 통치할 능력이 별로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야심도 많고 미친 듯이 권력다툼을 했습니다. 스딸린도 당연히 권력다툼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스딸린은 단순한 혁명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가를 통치할 능력도 있었고 권력다툼도 아주 잘했습니다. 스딸린은 혁명원로들의 개인야심, 착각 등을 교묘하게 이용했고, 승리했습니다. 1920년대 말 스딸린은 자신보다 힘이 많던 사람들을 모두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전: 교수님, 스딸린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그리고 부하린을 정치국에서 쫓아냈다고 얼마 전에 말씀해 주셨는데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란코프: 1920년대말이나 30년대초 스딸린은 아직 혁명원로들을 사형장으로 보낼 힘은 없었습니다. 당 간부들은 1910년대 말 혁명과 공민전쟁 때 스딸린이 그저 고급 간부였지만, 지노비예프나 부하린은 혁명 지도자였음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 소련공산당 정권은 공산당과 별 관계없는 양민들을 많이 학살했지만, 공산당 당원이나 간부라면 대부분의 경우 처형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920년대 말 지노비예프, 부하린 그리고 카메네프는 중급간부로 임명되고, 주로 시골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전:지노비예프 등 혁명지도자들이 숙청된 뒤 어떤 삶을 이어갔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예를 들면, 지노비예프는 4년동안 시골대학 총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고위직에서 쫓겨났지만, 출당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출당 당했지만, 곧 복당되었습니다. 결국은 시골대학에서 총장으로 지나다가, 얼마 동안 모스크바에서 살았고, 한 잡지 편집위원으로 지냈지만, 1935년에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카메네프도 비슷합니다. 그는 잠깐 동안 출당되었지만 곧 복당했습니다. 그 후에 외국투자를 관리하는 위원장이 되었습니다. 북한 식으로 말하면 무역지도국 국장과 비슷한 직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그렇다면 부하린은 어떻습니까? 부하린은 스딸린의 친한 친구였다고 했으니 스딸린이 봐주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어느 정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29년 스딸린 자신은 부하린이 친구이기는 하지만, 요즘에 정치 때문에 의견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와 달리, 부하린은 출당 당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1937년까지 당중앙 위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1929년에 모든 권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얼마 동안 과학원산하 연구소에 소장으로 지냈습니다.
그 후에는 소련에서 두 번째로 큰 신문인 이즈베츠치야에서 편집위원장으로 지냈습니다. 당연히 이것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보다 좋은 대우였습니다.
전: 스딸린은 지노비예프와 같은 과거 경쟁자들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내용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1920년대말부터 숙청을 당했던 전 정치국위원들은 계속 사죄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범했던 잘못을 인정해야 했으며, 앞으로 스딸린과 당중앙의 노선을 위반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모두 다 셀 수 없을 만큼 스딸린을 극찬헀으며, 스딸린이 천재이며 절세위인이라고 했습니다. 공개적인 선언뿐만 아니라, 그들은 당중앙위원회와 스딸린에게 편지를 많이 쓰고, 앞으로 무조건 스딸린을 영원히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전: 교수님, 카메네프 같은 과거 스딸린의 정적들의 운명은 비참할 수 밖에 없었겠네요.
란코프: 당연히 그들이 살아남을 희망이 없었습니다. 스딸린주의 국가에서 권력을 잃어버린 고급간부가 끔찍한 죽음에서 도망칠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스딸린 시대의 소련이든 김일성 시대 북한이든 비슷합니다. 특히 1934-35년쯤 스딸린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많이 강화했습니다. 1930년대 중엽 들어와, 스딸린은 그저 최고권력자가 아니라,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위대한 수령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제부터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스딸린은 옛날 경쟁자들을 없애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카메네프 등은 조만간 스딸린을 반대하는 내부 반대세력의 핵심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그렇다면 스딸린의 친구 부하린도 후환을 생각해서 결국에는 제거 대상이었겠지요?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것은 권력투쟁입니다. 스딸린은 그가 살아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전에 발간된 부하린에 관한 자료를 보면, 그가 죽기직전에 스딸린에게 보낸 편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스딸린도 자신이 무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정치 이유 때문에 부하린을 죽일 필요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부하린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으며, 스딸린에게 숙청의 전략에 대해 질문하는 내용으로 편지가 끝납니다.
전: 카메네프 등 정적들을 제거할 때 스딸린은 어떤 명분이나 혐의를 내세웠을까요?
란코프: 당시에 스딸린주의 국가에서 수령에 도전하는 사람은 그저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외국간첩이라고 주장하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이후에 모든 스딸린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면 북한에서 1955년에 재판을 받은 박헌영은 미국간첩이라는 웃기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만약 당시에 북한노동당 내부 권력투쟁에서 이긴 사람이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었다면, 지금 박헌영은 민족의 태양이 되었고, 김일성은 미국과 일본 간첩의 딱지를 받고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936-37년에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부하린 모두 체포되었고, 공연재판을 받았습니다. 공연재판에서 카메네프 들뿐만이 아니라, 1920년대 초 혁명지도자들 대부분이 외국간첩이나 반혁명 분자로 기소되고, 당연히 사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처형되었고, 그들의 이름조차 역사책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이것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을 지도한 사람들의 종말이었습니다. 남아있는 사람은 수령이 된 스딸린 뿐이었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