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딸린 시대 동구권의 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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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교수님, 지난 시간에 1920년대 스딸린은 자신보다 권력과 인기가 많은 사람들을 많이 숙청했고, 1930년대 그 사람들을 처형장으로 보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공산국가들은 어떘을까요?

란코프 교수: 1930년대 스딸린이 대숙청을 할 때, 당시에 세계에서 공산국가는 사실상 소련뿐이었습니다. 다른 사회주의진영 국가들은 1940년대말이나 50년대 초 소련을 흉내내야 했습니다. 소련을 모방했기 때문에, 동구라파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은 '일당제' 혹은 '사실상의 일당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별로 작은 스딸린들이 등장했습니다. 이들은 스딸린을 모방했던 각국 지도자들입니다. 물론 동구라파뿐만 아니라 몽골과 북조선에서도 매우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 나라들에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마자, 간부들의 치열한 이전투구 권력투쟁, 즉 개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각 나라들에서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죽이고 죽였습니다.

전: 1940년대 말, 당시에 소련군대가 주둔한 거의 모든 동구라파 나라들에서 공산국가가 등장했습니다. 물론 공산당 정권 탄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소련의 정치적 압력과 후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공산당 정권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았습니까?

란코프: 우리가 몇 개월 전에 살펴본 것처럼, 동구라파에서 공산주의정권과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지지율의 수준은 나라별로 매우 달랐습니다. 한편으로 체코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았습니다. 반대로 웽그리야 (헝가리)나 루마니아에서 공산당에 대한 지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공산당정권에 대한 지지율은 숙청의 규모와 별로 상관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처음부터 반공사상이 심한 웽그리야에서 고급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재판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루마니아에서 숙청당했던 사람들은 공연재판으로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포되지도 않은 채 그냥 시골에서 일반사람처럼 살았습니다. 한편 체코에서는 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많았지만, 공연재판이 있었습니다. 물론 공산주의사상이 인기가 높았지만, 스딸린의 소련과 거의 전쟁상태에 있었던 유고슬라비아는 사뭇 다른 경우입니다.

전: 공연재판이란 것이 좀 생소합니다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란코프: 아마 제일 흥미로운 재판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슬란스키 재판입니다. 루돌프 슬란스키는 체코 공산당 서기장, 즉 최고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시에 슬란스키는 공산당에서 최고 권력자가 아니라, 두번째 권력자였습니다.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한 사람은 고트왈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고트왈트는 슬란스키를 자신에 대한 위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슬란스키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고트왈트에 도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스딸린 시대 공산국가들 고급정치의 살인적인 특징입니다. 이들 나라들에서 위대한 1인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구조가 등장할 때까지, 고급간부들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은 혁명동지, 즉 다른 고급간부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경쟁자는 자신을 제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살인적인 개싸움입니다. 이러한 개싸움을 초래한 것은 사람의 개인야심보다 그들이 속했던 정치구조에 기본 이유가 있습니다.

전: 그래서 슬란스키는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란코프: 1950년대 초 사회주의진영 국가들 어디에서나 대체로 비슷한 모습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슬란스키를 숙청한 고트왈트이든 박헌영을 숙청한 김일성이든 모두 다 1930년대 부하린이나 카메네프를 제거한 스딸린을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그 때문에 1952년에 슬란스키는 먼저 해임당했고 출당 당했습니다. 다음에 체포되었고, 재판소로 끌려 나왔습니다. 외무상을 비롯한 기타 고급간부 13명도 슬란스키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이것도 흥미로운 특징입니다. 공연재판을 할 때 거의 어디에서나 핵심 피소자뿐만 아니라 10-15명 정도의 피소자들이 등장했습니다.

전: 그러니까 주인공이 있으면 거기에 따라 나오는 조연들이 있는 극장 공연과 같은 것이군요. 이 경우 슬란스키는 주인공이고, 외무상을 비롯한 10여명은 조연 배우들인 셈이네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사전에 정해진 대본이 있었습니다. 지금 공개된 자료들을 보면, 이 대본을 작성한 사람들은 체코 보위원들 뿐만이 아닙니다. 소련에서 파견된 보위원들이 참가했습니다. 외무상을 비롯한 조연들은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자신이 미국, 영국, 이스라엘 간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유대인들이 많아서, 당시에 소련과 적대관계가 있었던 이스라엘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슬란스키는 젊은 시절 때부터 공산주의운동을 했고, 1930년대 에스빠냐에서 싸웠고, 1944년부터 체코에서 유격활동을 지휘한 사람입니다. 그런 공을 세운 인물임에도 그는 고문을 받았으며,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굴복했으며, 자신이 미국간첩이며 반혁명분자임을 자백했습니다.

전: 누가 봐도 공연재판이 허구이고 피소자들은 억울하게 당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당시에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의 인민들은 이 공연재판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란코프: 반공사상이 처음부터 강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슬란스키에 대해 동정을 느꼈을지는 약간 회의적입니다. 인민들이 보기에는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죽이고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은 그저 이전투구 개싸움일 뿐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당시에 고트왈트가 아니라 슬란스키가 소련과 더 좋은 관계에 있었다면, 미국간첩이란 딱지를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간 사람은 고트왈트였을 것입니다. 1940년대말 50년대초 공산국가에서 기본 원칙은 고급간부가 옛날 혁명동지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곧 제거된다는 원칙입니다. 진짜 살인적인 권력투쟁입니다.

전: 슬란스키는 결국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이 반혁명분자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란코프: 있었습니다. 하지만 체코가 아니라 불가리아에 있었습니다. 물론 불가리아에도 공연재판이 있었습니다. 공연재판에서 주인공은 부총리였습니다. 부총리는 공연재판을 받았을 때, 갑자기 자신이 무죄이며, 모든 것은 가짜이며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그를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부총리는 사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전: 그렇다면 교수님, 50년대 초에 숙청당한 사람들은 전부 사형장으로 끌려갔나요?

란코프: 흥미롭게도, 동구권에서 소련과 달리 소수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도, 숙청 당한 사람들도 나중에 복권되었습니다. 그러나 복권은 당연히 상징적인 조치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졌을 때까지 언론도, 공식 역사학도 공연재판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죽은 사람들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거의 없습니다. 지금 동유럽 국가에서 반공산주의 사상이 매우 큽니다. 불가리아이든 체코이든 이 공연재판은 정치 테러일 뿐만 아니라 권력투쟁의 수단이었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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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