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무력 앞세운 소련의 개입으로 공산당 체제 유지
- 1970년 말, 반공주의 세력 급격히 확산
- 반공주의 지지한 폴란드 출신의 교황 등장, 소련식 제도 불만 확산
-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가 체제 불만으로 이어져, 결국 쿠데타 발발
폴란드, 즉 뽈스카 노동자와 젊은이들은 공산당과 사회주의 경제를 반대하고, 노동운동과 파업운동 등으로 공산주의에 맞섰는데요. 그럼에도 공산주의 체제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공산주의에 반대한 폴란드 노동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에 뽈스카(폴란드)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흥미롭게도 뽈스카 노동자들은 공산당을 매우 싫어했는데요. 특히 1980년대에 있었던 총파업은 잘 알려져 있죠.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반공세력의 인기가 높았고, 대부분 노동계급뿐 아니라 청년 학생들까지 공산당을 반대했음에도 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란코프 교수] 1950년대부터 폴란드 사람들에게 공산당 정권, 즉 폴란드의 통일노동당 정권은 반민족, 반민주 정권이었습니다. 당시 폴란드 사람들에게 당 중앙은 무엇이었을까요? 1930년대 일본 식민지 시대의 총독부와 같은 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 사회에서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 공산당 정권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소련의 무력간섭 위협입니다. 당시 폴란드 사람들은 소련에 도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소련도폴란드를 완전히 통제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균형은 1970년대 말에 들어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노동계급의 세력은 급격히 힘이 세지기 시작했습니다.
- 1970년대 말에 왜 갑자기 변화가 생겼을까요?
[란코프 교수] 몇 가지 이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폴란드는 다른 공산국가보다 종교, 정확히는 천주교의 영향이 대단히 컸습니다. 대부분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서 무신론은 국가가 지지하는 세계관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도시 사람이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78년, 폴란드의 고급 신부는 천주교 교회의 최고지도자, 즉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뽈스카는 자부심이 매우 커졌습니다. 천주교회는 처음부터 민주주의, 민족주의, 반공주의 경향이 아주 강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교황은 폴란드에서 반체제 세력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지원했고, 반체제세력은 큰 힘을 얻게 됐습니다.
- 교수님, 폴란드의 고급 신부가 교황이된 것이 국내상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하셨는데요. 그럼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시에는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에서 소련식 사회주의 제도에 대한 실망과 불만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이웃 나라에서 발생한 반체제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쓰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소련도 내부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기 때문입니다.
1980년 여름, 폴란드 정부는 고기와 식량 가격을 많이 인상했습니다. 폴란드 국민은 이 결정에 대해 크게 분노했고, 파업투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980년 8월에 폴란드 북부지역의 대부분 공장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갔습니다. 총파업이 시작됐습니다. 파업투쟁으로 나간 노동자들은 통일노동당 간부들을 공장에서 몰아내고, 자발적으로 파업위원회, 노동계급위원회를 만들어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그 위원회의 지도자 중에는 젊은 청년 학생 출신의 지식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인기가 많은 노동계급이었습니다. 당연히 대부분 노동자 위원회는 철저한 반공산주의, 또 민주주의 정신을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 차지했습니다.
- 교수님, 이것은 총파업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인민봉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폴란드 정부는 왜 이들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란코프 교수]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그들이 군대뿐 아니라 경찰에게 노동자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어도 이 명령대로 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 겁니다. 폴란드의 공산당 간부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이 인기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공산당 지도부는 겁을 많이 먹었기 때문에 제1비서였던 게릭을 퇴직시키고, 새로운 제1비서를 선출했습니다. 또 고급간부 다수를 교체했으며, 동시에 소련에 긴급지원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련에서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당연히 식량 가격 인상을 취소했고 많은 양보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양보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 교수님, 왜 의미가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예나 지금이나 혁명은 경제를 도와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도 문제가 많았던 폴란드 경제는 1980년에 발발한 총파업 때문에 더 어려워졌습니다. 엄격한 배급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주민의 생활 수준도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주민들은 어려워지는 경제 위기에 대한 책임을 공산당 지도부에게 돌렸습니다. 갈수록 체제에 대한 불만은 더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1년 12월, 폴란드 군대는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 군대가 어떤 쿠데타를 일으켰나요?
[란코프 교수] 매우 부드러운 쿠데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폴란드의 군대 지도자들은 공산주의를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애국심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나라의 혼란이 더욱 심해진다면, 소련의 무력간섭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군대 지도자들에게 매우 큰 위협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노동계급의 요구와 민중의 요구에 대해서 공감했습니다. 결국은 타협입니다. 그들은 정권을 잡고, 공산당도 노동운동도 아닌 군대가 몇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겠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여전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최고 지도자들은 주로 장성들이었습니다. 또 노동운동가들이 많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처형된 사람은 없었고, 일반 감옥이 아닌 여관이나 휴게시설로 이용되었던 좋은 건물에 연금됐습니다. 그들의 조건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 공산당도 노동계급도 아닌 군대가 폴란드를 통치하게 됐는데요. 결국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매우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데요. 1980년대 말 소련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군대는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할 능력도, 그럴 필요도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군대와 공산당은 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노동 운동이 합법화됐습니다. 또 1989년에는 자유 선거가 실시됐고, 당연히 반체제 세력이 압도적으로 승리했습니다. 노동운동 지도자 가운데 제일 유명한 사람인 바웬사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몇 년 뒤 공산당의 인기가 높아졌고, 공산당 지도자가 다음 대통령에 당선됐습니다. 숙청도 아예 없었습니다. 쿠데타를 시작한 야루진스키 장군은 늙을 때까지 별문제 없이 잘 살았습니다. 당연히 폴란드는 지금 동구라파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공산주의에 반대한 폴란드 노동자에 관한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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