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7월 30일은 북한에서 남녀평등법을 발포한 날입니다. 북한은 74년 전인 1946년 7월 30일에 남녀평등법을 제정했는데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남녀평등은 꽤 중요한 정책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남녀평등에 대한 이념과 태도는 공산주의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차이가 큽니다. 공산당정권은 세계 어디서나 남녀평등을 많이 운운했지만, 남녀평등이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는 여러 번에 걸쳐 내용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처음부터 살펴봅시다. 1840-50년대 맑스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당시에 매우 급진적인 남녀평등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똑같은 투표권을 받아야 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부문에서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가족을 반동적 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오늘날 공산주의국가의 자료들을 보면, 가족은 '사회의 세포'라고 쓰여 있는데요.
란코프 교수: 맞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국가들에서 남녀평등의 내용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19세기 말 초기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희망한 완벽한 사회가 생기면, 가족도 없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남자와 여자들은 서로 사랑하면 같이 살고, 서로 싫어지면 따로 살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사회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국가가 남녀관계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이론입니다.
기자: 하지만 교수님, 초기공산주의자들은 왜 그렇게나 가족이란 개념을 반대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그들은 기존 사회를 파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초기공산주의자들은 가족이 기존 사회의 핵심 중의 하나인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족제도를 파괴한다면 부르주아 사회를 파괴하기가 보다 쉬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로 말하면 그들에게 합리적인 태도였습니다 .
기자: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들은 가족제도를 어떻게 파괴하려고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소련공산당은 정권을 잡자 가족에 대한 부문에서 중요한 변화를 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결혼 등록 제도의 폐지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사랑한다면 그냥 살면 되고, 국가에 등록할 필요가 아예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헤어진다면, 남자는 자녀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남성이 다른 여성과 헤어진다면, 소득의 4분의 1 정도는 자녀들을 위해서 주어야 했습니다. 국가는 이러한 체제를 엄격하게 실시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결혼 등록 제도가 없다면, 누가 자녀들의 아버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란코프 교수: 약간 문제가 있지만 대체로 별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남자와 여자가 얼마 동안 같이 살고,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는 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법률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중절의 자유가 인정되었습니다. 임산부는 자녀를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 때나 자유롭게 병원으로 가서 중절하면 됩니다.
기자: 1920년대 초 소련의 조치는 매우 혁명적인 조치인 것 같습니다. 당시에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혼이나 중절 수술에 대한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오늘날에도 세계 많은 나라에서 여성운동의 기본 요구인데요. 하지만 이 만큼 자유가 많은 것은 공산국가가 아닌 것 같은데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이러한 자유는 물론 오랫동안 지속하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 들어와 소련에서는 예전의 혁명정신이 많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소련사회의 변화를 간단하게 묘사한다면, 국가 역할의 강화, 옛날 전통의 부활, 사회에 대한 통제 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혁명가들은 정권을 잡기 전에, 환상이 많을 뿐만 아니라 국가를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국가를 장악한다면, 혁명가들은 새로운 특권계층이 됩니다. 하루아침에 권력자가 된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기존 사상을 져버리는 사례들이 많았습니다. 혁명가들은 자신이 장악한 국가를 강화하는 것은 좋은 일이고, 이제 국가는 바로 자신들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 소련 지도부는, 원래 자신들이 싫어했던 옛날식 가족의 개념이 바로 국가의 기반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제도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소련지도부에 가족제도는 바로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기자: 소련지도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족제도를 부활시키려 했나요?
란코프 교수: 1944년에 혼인 등록이 다시 의무화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소련에서 여자는 남자와 혼인 신고를 하지 않는다면, 그 남자에게서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 지원을 받을 권리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남자가 아이들의 아버지인 것이 확실해도, 혼인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남자는 돈을 주지 않아도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7년에는 소련공민과 외국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습니다. 중절수술 역시 1935년부터 금지되었고, 중절수술을 한 임신부도 의사도 모두 벌금을 내야 했고, 특히 의사와 간호사는 감옥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혼은 여전히 가능했지만, 예전보다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공산당원이나 책임일꾼이라면 이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소련지도부는 1920년대 초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가족제도를 거의 모두 취소했는데요. 그들은 왜 이같은 개혁을 추진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개혁은 가치가 없지 않았습니다. 소련은 1940년대 옛날 가족제도를 거의 부활했지만, 그래도 소련공산당 간부들의 의식과 세계관은 혁명 이후 20년간 이미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다시 가족제도는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나요? 자유화일까요 아니면 통제 강화일까요?
란코프 교수: 스탈린 사망 이후 권력을 장악한 흐루쇼프는 소련을 많이 자유화했습니다. 북한에서 흐루쇼프는 수정주의자라는 비난이 많지만, 흐루쇼프는 진짜 공산주의를 굳게 믿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칭찬이 아닙니다. 흐루쇼프는 1840년대 맑스나 앵갤스와 같은 사상가의 주장을 많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다시 가족법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결혼등록은 여전히 의무적인 것이지만, 이혼은 많이 간단해졌습니다. 외국인들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공식적인 제한이 많았지만 그래도 가능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1965년부터 낙태도 다시 합법화되었습니다. 중절수술은 무상 치료 대상이 아니라도 돈을 내야 했지만, 그래도 합법입니다. 1950년대 말부터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가족제도는 별 다른 추가 변화가 없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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