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1989년 8월 15일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 학생은 북한 체류를 마치고 판문점을 지나 남한으로 돌아갔습니다. 당시에 임수경의 활동은 북한에서 큰 화제였는데요. 그런데 임수경이 참가한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도대체 어떤 행사인가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행사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공산주의혁명이나 사회주의혁명을 준비하기 위해서 여러 나라 공산당은 벌써 1930년대부터 통일전선 전술을 열심히 쓰고 있었습니다.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공산당세력이 보이지 않게 통제하는 여러 단체가 공산당의 이익에 맞게 활동하도록 하는 전술입니다. 직업동맹이든 예술가동맹이든 말로는 다른 단체이지만 사실은 공산당이 시키는 데로 움직입니다. 이것은 통일전선입니다. 물론 통일전선에 참가하는 단체는 자신이 독립된 단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산당의 기구에 불과합니다. 통일전선에 따라서 자기 나라에서 혁명을 잘하고 민중에게 선전을 잘 하기 위해서 공산당은 체육단체, 예술단체, 각종 단체를 사실상 장악합니다. 물론 청년단체도 예외가 아닌데, 1945년에 소련과 공산주의국가들은 세계민주청년련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단체의 이름은 듣기 좋지만 당연히 소련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나라 공산당이 전 세계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기구 뿐입니다.
기자: 정말 세계민주청년련맹은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기구일 뿐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1940년대말 이 단체가 활동을 시작했을 때 핵심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알렉산드르 셀레핀라는 소련 간부였습니다. 그는 세계민주청년연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들어와 이 직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새로운 직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 직업은 소련 KGB의 최고책임자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계민주청년연맹 최고 핵심 간부는 몇 년 동안 일한 다음에, 곧바로 KGB 최고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세계민주청년연맹이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가진 단체의 실체를 매우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기자: 세계민주청년연맹은 그냥 공산당의 일부일 뿐인데요. 이 단체는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주최하는 단체입니다. 그렇다면 청년학생축전도 그냥 공산주의 선전의 일환인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소련공산당과 여러나라 공산당의 기본 전략과 목적에 맞게, 선전활동을 하고, 전 세계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첫번째 행사는 1947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열렸습니다. 참가자들은 공산당 청년단체도 있었고, 친소련, 친공산당 경향이 많은 단체들도 있었습니다. 참가 자격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초청을 받은 단체면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누구를 초청할지는 세계민주청년연맹, 즉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들의 공산당과 특무기관들이 결정했습니다.
기자: 이것은 세계 청년학생축전이 아니라 공산주의학생청년축전인데요.
란코프 교수: 조금 과장된 이야기입니다. 통일전선 전술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공산당에 대해서 의심과 불신감을 어느정도 가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지만 좌익경향이 많은 사람들도 청년학생 축전에 참가했습니다.
기자: 축전은 몇 년마다 열렸을까요? 개최 장소는 모두 공산국가의 수도인가요?
란코프 교수: 원래 2년마다 열렸습니다. 1960년대 후반부터 5-6년에 한번씩 열리게 되었습니다. 개최 장소는 대체로 동유럽 국가들입니다.
기자: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큰 행사를 열고, 세계 좌익 청년들에게 공산주의의 위대성을 선전하면 좋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조금 그렇지 않았습니다. 1953년 스딸린 사망 이전까지 소련은 많은 외국사람들이 참가하는 행사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사람들은 통제하기도 어렵고, 외국인들은 소련사람들에게 위험한 사상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감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민주청년동맹은 통일전선 기관입니다. 그래서 소련이나 공산주의운동과의 관계를 숨길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957년에 제5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것은 소련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자: 왜 그럴까요?
란코프 교수: 스탈린 사망 이후 소련은 자유화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 수정주의자로 비난하는 흐루쇼프는 소련 최고지도자들 중 공산주의 사상을 가장 굳게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이 온다고 해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흐루쇼프는 공산주의사상의 우월성을 믿었고, 그래서 외국인들이 모스크바에 온다면 공산주의에 감동을 받고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57년에 3만 명 이상이 참가하는 모스크바 대회가 열렸습니다. 행사는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아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만큼 많은 외국 사람들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외국인 참가자들은 아무 제한을 받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모스크바를 돌아다닐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외국인들은 압도적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들과의 접촉으로 소련사람들은 외국생활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세계청년학생축전 역사에서, 1957년 모스크바 대회는 가장 절정기였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그 후에 세계청년학생축전은 갑자기 쇠퇴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그렇지는 않았지만, 갈수록 영향력이 작아지고 있었습니다. 핵심은 중소 분열입니다. 중국은 1960년대부터 이 행사가 수정주의 행사라고 선언하고,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상황에서 청년학생축전은 친소, 친공산당 성격이 더욱 뚜렷히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평양 축전은 공산주의시대 마지막 축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자: 1989년 평양 축전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세계역사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북한 역사에서 의미가 많습니다. 물론 1957년 모스크바 대회와 달리 북조선의 향후 발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북한사람들의 의식, 세계관에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기자: 1990년대초 공산권은 무너졌습니다. 세계청년학생축전도 함게 사라졌나요?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원래 그들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진영에서 돈과 지원을 많이 받았는데요. 지원을 많이 받을 수 없게 되자 규모도 영향력도 많이 작아졌습니다. 오늘날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중요한 행사가 아닙니다. 좌익단체들 가운데서도 중요한 행사가 아닙니다. 그래도 3-4년마다 열리고 있는데, 2017년에는 러시아 소치에서 열렸습니다. 이 운동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매우 주변화되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