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지도자들의 후손들: 미그기 개발자 미코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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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지난번에 우리는 소련 최고위급 간부들의 자녀들과 손주들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소련붕괴 이후 사업을 잘 하고 부자가 된 사람도 많고,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혹시 그렇지 않은 고위 간부도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소련 최고위급 간부들의 자손들의 생활이 지금 어떤 지 알아보았을 때, 약간 실망이 없지 않았습니다. 1920-30년대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은 권력욕이 너무 많고 거짓말과 왜곡을 밥 먹듯이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동지들을 거리낌 없이 죽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원칙이 완전히 없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 대부분은 특권과 권력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 가운데 고급간부가 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쉽고 풍요로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예외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아나스타스 미코얀입니다. 그의 자녀들은 특권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전쟁 때 열심히 싸웠을 뿐만 아니라 소련시대에도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전: 아나스타스 미코얀이라면 북한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근데 북한에서는 미코얀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죠?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미코얀은 1956년에 김일성과 그 측근들에 도전했던 최창익이나 박창옥을 비롯한 북한노동당 반대파, 바꾸어 말해서 반김일성파를 많이 지지하기 위해서 1956년 9월에 평양에 도착한 소련 중국 공동 대표단 단장이었습니다. 당시에 당연히 김일성은 소련 압박에 굴복하고, 지킬 생각조차 없는 거짓 약속을 했습니다. 절대권력을 얻기 위해서 했던 일입니다. 당연히 김일성은 미코얀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전: 미코얀의 출신은 어떠했습니까?

란코프: 미코얀은 1895년에 아르메니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동생이 있었는데, 북한사람들은 그 동생의 이름을 형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전기자님은 소련의 전투기라면 어떤 이름이 생각나십니까?

전: 미그기 아닙니까?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미그 전투기의 M자는 바로 미코얀을 의미합니다. 흥미롭게도 북한은 미코얀을 엄청 비난했을 때, 그의 동생인 기술자 미코얀이 개발한 전투기를 얻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했습니다. 미코얀은 학생시절 때 혁명활동을 시작했고, 레닌이 아직 살아있을 때 정치국위원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45년 가까이 정치국 위원으로 계속 활동했습니다. 그는 브레즈네프 시대까지 정치국 위원이었는데, 나중에 건강이 나빠져서 퇴직했고,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아르메니아 소수민족 출신의 여자와 결혼했고, 그들 사이에 아들 5명이 있었습니다. 죽은 혁명동지의 아들을 키운 적도 있습니다. 한편 그의 부인의 동생은 소련군대 정찰국의 고급간부로 지냈고, 1930년대 에스빠냐, 중국, 일본에 대한 비밀공작활동을 지휘한 사람입니다.

전: 미코얀의 아들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란코프: 아들들은 거의 모두 자신들의 작은 아버지, 즉 미그전투기 개발책임자로 거의 30여년 동안 일한 작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두 다 공군 군관이 되었습니다. 5명중 3명은 그냥 군관이 아니라, 제일 어렵고 제일 위험한 일, 즉 전투기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전투기 비행사였고, 전쟁 때 파쇼 독일군대 비행기를 6대나 격추시켰습니다. 물론 자신도 격추를 당해서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후에도 전쟁 때만큼 위험한 일을 했습니다.

미코얀의 장남은 새로운 전투기의 실험 비행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소련공군에서 매우 냉정한 판단력과 용감성을 인정받았고,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흥미롭게 1970년대 말 나이가 조금 많아서 직접적으로 실험 비행을 할 수 없게 되자, 우주 비행사 훈련 담당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는 장수했는데 2017년에 95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손자손녀는 7명입니다. 학자도 있고, 음악가도 있는데, 사업을 하는 장사꾼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른 고급 간부의 후손들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전: 미코얀의 다른 아들들은 어땠습니까?

란코프: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장남과 조금 비슷한데, 두 사람 다 공군 군관이 되고, 전쟁 때 파쇼독일과 싸웠습니다. 둘째 아들은 원래 전장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의 상급자들은 미코얀의 아들을 전투장으로 보내는 것에 걱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들은 전장에 나갈 것을 고집했고, 결국 전선으로 나가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1942년에 전사하였습니다. 셋째 역시 비슷하게 1942년부터 전투기 비행사로 싸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셋째 아들은 전역하지 않고 공군 사단장, 나중에 군단장까지 되었습니다.

전: 미코얀의 아들들은 용감했군요. 지도층이나 일반인들에게도 모범이 됐을 것이고요. 그러면 넷째와 다섯째는 어땠을까요? 그들도 군관이 되었나요?

란코프: 한 명은 원래 공군학교에서 공부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비행사가 되지 못하고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북조선 공군에서 미그-23형과 미그-29형 전투기가 있습니다. 미그-23형과 미그-29형의 개발 책임자는 바로 미코얀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 역시 대부분의 미코얀의 가족들처럼 오랫동안 살았고, 3년 전인 2016년에 89세의 나이로 모스크바에서 사망했습니다.

전: 북한은 아나스타스 미코얀을 아주 싫어했다고 하셨는데, 그의 아들이나 동생이 만든 전투기에 거부감이 없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사실상 없습니다. 미그 전투기는 좋은 전투기이기 때문입니다. 남조선을 공격할 때 아주 유용한 전투기였습니다.

전: 그렇다면 미코얀의 막내 다섯째 아들은 어땠습니까?

란코프: 그는 국제관계대학, 즉 외교관 학교를 졸업했지만 외교관이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힘이 많은 아버지 덕분에 아무 때나 외교관이나 무역일꾼이 될 수 있었지만, 그 대신에 학자가 되고, 특히 남미 역사를 했습니다. 그는 2010년에 사망할 때까지 사회주의가 가능할 줄 알았고, 스딸린은 사회주의 본질을 왜곡한 현대수정주의 우두머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전: 현대수정주의 우두머리라는 표현은 북한인들이 미코얀을 지칭할 때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코얀측은 현대수정주의의 우두머리는 김일성, 스딸린 특히 중국 모택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교수님, 미코얀의 아들들은 모두 다 성공한 군관, 기술자, 학자, 즉 정치가 아닌 분야의 고급 간부 수준으로 퇴직한 셈인데요, 이들이 성공 뒤에는 아버지의 후광이 있었기 때문 아닐까요?

란코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소련 최고지도자 후손들의 대부분은 무역일꾼, 외교관, 나중에 돈이 많은 사업가나 금융일꾼이 되었지만 미코얀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가족 배경이 없었더라도 이들은 대체로 성공했을 것입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