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공산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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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공산권, 즉 사회주의진영이 형성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습니다. 하지만 몽골인민공화국과 몽골 북쪽에 접경한 작은 나라 투바인민공화국은 1920년대에 이미 사회주의 국가가 됐습니다. 몽골이 이렇게 일찍 사회주의 국가가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몽골인민공화국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동유럽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과 조금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1945년에 소련은 뽈스카나 웽그리아와 같은 동구국가들에 군대를 보내고, 군사적 전략적 이유로 이 지역을 완충지대로 만들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동구권에서 친소정권을 많이 설치했습니다. 물론 이들 국가 주민들이 사회주의를 무조건 반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은 동유럽에서도 지지가 있었고, 수많은 나라에서 매우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북한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1940년대말 북한에서 공산정권이 생긴 기본적인 배경은 소련정부가 이 지역의 전략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해 군대를 북한에 진입시켰고, 소련을 위협할 수 없는 완충지대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1920년대 초에는 소련이 동구나 한반도에 진입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와 몽골로 진입할 능력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공산화시키려 노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소련 정부가 1917년 이후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실시한 정책은, 1917년 이전 제정러시아 정부가 실시했던 정책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전: 먼저 몽골인민공화국 탄생의 배경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란코프: 네. 지금 세계에서 몽골이라는 지역은 두개인데요. 엄밀하게 말하면 3개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내몽고입니다. 지금 중국 땅인데, 갈수록 그곳에서 몽골어와 몽골문화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몽고로 이민간 중국 한족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지역은 지금 몽골공화국입니다. 역사적인 이름은 외몽골입니다. 세 번째 지역은 외몽골 이북에 위치한 부랴트입니다. 17세기말부터 러시아 영토인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몽골어와 거의 같은 말을 하는 부랴트족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의 영향을 오래 전부터 많이 받고 있습니다. 지금 독립 몽골국가로 남아있는 외몽골은, 17세기부터 1911년까지 중국에 속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에 중국을 통치한 사람들은 만주족인데요. 그들은 중국의 핵심 다수민족인 한족을 무시했지만, 몽골 소수민족들은 자신들과 거의 평등한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사실상 몽골사람들을 어느정도 우대했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말하면 당시에 몽골은 매우 낙후하고 어렵게 사는 유목 지역입니다. 그러나 1911년에 중국에서 신해혁명 때문에 만주족이 통치했던 청나라가 무너졌습니다. 이것은 몽골 귀족들에게도 백성들에게도 매우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전: 친몽골 정책을 폈던 청나라가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란코프: 몽골사람들은 만주족이 중국을 통치했을 때 어느 정도 특권이 있었지만,
그 후에 한족들이 통치하는 중국에서 강제적인 문화말살 정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내몽골에서 실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역사를 보면, 중국에 흡수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주 많습니다. 이 공포는 지난 100년동안 몽골의 대외정책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국내정책까지 결정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신해혁명 직후에 몽골 귀족들과 불교 스님들이 모이고, 독립선언을 했습니다. 당시에 몽골에서는 불교의 영향이 매우 컸습니다. 독립선언 직후에 최고지도자가 된 사람은 불교 스님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복드 칸 입니다. 티베트 출신인데 어린 시절부터 몽골에서 살아서 복잡한 정치상황을 잘 알았습니다.

전: 당시만 해도 중국과 몽골은 군사력, 국력 차이가 컸는데 중국이 어째서 몽골의 독립선언을 무력 진압하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물론 중국은 당시에 국내 상황이 빠르게 어려워지고 있어서 진압은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확실히 진압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몽골 독립선언을 지지한 강대국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17세기말부터 이 지역에 관심이 많던 제정 러시아입니다. 러시아는 1912년에 새로 생긴 대몽골국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1915년에 제정러시아, 대몽몰국, 중화민국은 또 하나의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조약에 의해서 대몽골국은 완전한 주권국가는 아니지만, 사실상 독립지역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제정 러시아는 당시에 몽골을 완벽한 식민지가 아니더라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 만들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식민지로 만들면 좋겠다는 속셈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몽골 귀족들도 평범한 유목민들도 러시아의 간섭을 당시에 별로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을 너무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전: 1920년대 초 몽골인민공화국이 생깁니다. 어떻게 공산국가가 되었을까요?

란코프: 1917년에 러시아에서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는 매우 심각한 내전과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 정부가 없던 러시아는 자신의 위성국가로 볼 수도 있는 대몽골국을 보호할 능력이 일시적으로 없어졌습니다. 중국정부는 이것을 좋은 기회로 보고, 1919년에 몽골에 침범하였고, 몽골인들은 이에 대항해 싸웠지만 그들은 중국 군대와 싸울 전투능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은 오랫동안 몽골을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 군대가 몽골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군대는 공산당의 붉은 군대 적군이 아니라 백군이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 패배를 피하기 어려웠던 백군 일부는 몽골을 자신의 기지로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몽골사람 대부분은 러시아의 백군을 해방군대로 환영했고, 중국군대는 곧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 적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몽골이 이제부터 공민전쟁 (러시아 적군 백군 간의 내전)의 또 하나의 전투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 그래서 공산당의 적군이 몽골에 침입했습니까?

란코프: 당연히 그렇습니다. 당시에 소련공산당 정권은 몽골침입에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요. 한편으로 반공세력, 백군세력의 매우 위험한 기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소련공산당은 제정러시아처럼 몽골 지역을 러시아나 소련을 위협할 수 없는 완충지대로 만들 생각이 있었습니다. 물론 1917년 이후에 소련은 이런 저런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을 때, 이들 나라 공산주의자들을 자신의 동맹자로 키웠습니다. 그들은 선전일꾼의 역할도 했고, 병력이 될 수도 있고, 중요한 첩보를 제공하는 공작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전략은 우리가 나중에 셀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지만, 몽골은 이 전략의 시험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