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긴장과 대립의 관계였던 동∙서독, 적대감은 크지 않아
- 서독 "동독과 수교한 국가와 단절"
- 동독 "서독과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
- 1972년 관계 정상화 모색, 서로 왕래 허용되기도
분단국가였던 동독과 서독은 남북관계처럼 긴장과 대립관계였습니다. 또 동독은 서독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동서독은 서로 전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대감이 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 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동서독은 왕래도 자유로웠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상황과 비슷했지만, 달랐던 동독과 서독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 교수님,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독일 이야기를 계속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독일에서 결국 두 개의 나라가 생겼다고 말씀하셨는데요. 동독과 서독은 어떤 나라였나요?
[란코프 교수] 동독, 즉 도이칠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소련의 매우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습니다. 구소련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였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당시 동독은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민민주주의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사회주의의 준비 단계입니다. 1940년대 초부터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이후 사회주의 건설을 시작하기 전에, 인민민주주의 정치를 먼저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독에서 집권세력은 통일사회당이었는데, 이 당의 역사는 조선노동당의 역사와 매우 비슷합니다. 1946년 여름, 동독에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합당해 통일사회당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통일사회당은 이름뿐이었고, 사실상 공산당입니다. 이 밖에 작은 정당들이 몇 개 있었는데, 그들은 1946년에 모두 다 민족통일전선에 가입했습니다.
- 교수님, 이것은 1946년 북한의 역사와 매우 비슷한 것이 아닐까요?
[란코프 교수] 북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먼저 신민당과 합당하고, 이름을 조선노동당으로 바꾸었습니다.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에 천도교청우당과 사회민주당도 모두 가입했습니다. 동독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40년대 말 동독이든 북한이든 뽈스카(폴란드)이든 소련이 결정한 대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국가는 주민들의 지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동독과 북한에서도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인기가 많아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희망이 컸기 때문입니다.
- 교수님, 그런데 독일의 서부에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정치를 시행하는 서독, 즉 도이칠란트 연방공화국이라는 나라도 생겼는데요. 동서독의 관계는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그들의 관계는 남북관계만큼 긴장과 대립이 많았습니다. 당시 서독의 기본 원칙은 동독과 수교한 나라는 서독과 수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60년대 말까지 동독과 수교한 나라들은 서독에 대사관이 없었습니다. 유일한 예외는 소련입니다. 소련은 초강대국이니까 처음부터 서독과 동독에 대사관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1960년대 말까지 남북한 관계와 매우 유사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많습니다. 서독과 동독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양측은 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시작할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기본적인 이유는 이러한 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서독은 전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남북한만큼 적대감이 심하지 않았습니다.
- 그런데 동서독은 통일이 자신들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나요?
[란코프 교수] 아주 복잡한 질문입니다. 서독은 통일이 국가의 기본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1972년에 동서독은 이른바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서로 주권국가로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서독의 헌법과 법률은 동독을 기타 국가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서독 헌법에서 수도는 베를린이라고 계속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동독은 통일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동독과 서독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 교수님, 서독은 동독을 인정했는데, 동독은 서독을 민족으로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동독은 왜 그렇게 주장했나요?
[란코프 교수] 당시 동독은 독일에서 두 개의 민족이 생겼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독 지도부는 마르크스를 비롯해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제안한 민족이론을 많이 이용했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비롯한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민족이 혈통이나 언어가 아닌 의식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도 다른 민족에 속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 교수님, 아주 이상한 주장으로 들려서 더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혈통인데 왜 다른 민족인가요?
[란코프 교수] 대부분 한국이나 북한 사람들의 상식과 달리,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지금도 세계에서 꽤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독일말을 쓰는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입니다. 남미에서는 스무 개 정도의 국가가 모두 에스파냐 말을 쓰고 역사도 비슷하지만, 전부 다른 나라입니다. 의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동독 지도부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통일을 원하는 서독의 희망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 그런데 교수님, 조금 전에 동서독이 1972년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사실상 서로를 다른 나라로 인정했다고 하셨는데요. 왜 그랬나요?
[란코프 교수] 1960년대 말 서독에서는 진보파 세력인 사회민주당이 권력을 잡았습니다. 새 수상인 브란트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았지만, 통일에 대한 희망을 조용히 포기했습니다. 그는 사실상 동독을 또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하기 위해 기본조약을 제안했습니다. 동독 측은 이 제안을 환영했고 그때부터 동서독의 관계는 정상화되었습니다. 브란트는 전 세계 다른 나라들에도 동독과 수교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 동서독의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하셨는데요. 동서독 사람들은 서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나요? 특히 흩어진 가족은 어떻게 됐나요?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독일에서는 흩어진 가족 문제가 없었습니다. 서독 사람들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동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돈을 내야 했지만, 서독 사람들에게 그리 큰돈이 아니었습니다. 매년 동독을 방문한 서독 사람은 20~30만 명 정도였습니다. 물론 동독 사람도 서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당과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허락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매년 수만 명이 서독으로 갔습니다. 60세 이상 노인들은 아무 때나 서독으로 갈 수 있었고, 아예 이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 교수님, 60세 이상 노인들은 왜 아무때나 서독으로 갈 수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노인들이 서독으로 가면, 동독 정부는 그들에게 연금을 줄 필요도 없고, 그들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독 정부는 동독 노인들은 서독으로 이주하면 서독 노인들과 같은 수준의 연금을 주었습니다.
-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면, 동독 사람은 서독 사람의 생활을 잘 알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다음 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동독과 서독의 관계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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