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에 1930년대 중반에 처이발상이 몽골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수 십 년 동안 몽골인민공화국 정치는 별다른 변함 없이 지속되었다고 하셨는데요. 처이발상 통치 체제의 몽골은 어떤 나라였습니까?
란코프 교수: 아마 제일 먼저 1930년대말 40년대초 몽골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벌써 말씀 드린 바와 같이, 1920년대는 몽골 인민혁명당, 즉 몽골공산당의 개싸움 시대였습니다. 20년대초 소련의 지원을 받고 몽골 공산화에 참가했던 거의 모든 간부들은 숙청되고 처형되었습니다. 물론 처이발상은 이와 같은 숙청을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1930년대 들어와 몽골에서 고급간부뿐만 아니라 중급간부까지 1920년대 공산혁명 지도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들어와 처이발상은 숙청을 대체로 끝냈고, 그 후에 몽골 당 내부의 갈등과 숙청의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지도부에서 상황이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말 처이발상은 종교말살정책을 실시했습니다. 당시에 스님들과 불교지식인들은 거의 다 사형장으로 보내졌습니다. 이것은 매우 심한 학살입니다. 당시에 몽골에서 스님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기 때문입니다.
전: 공산주의가 원래 종교를 부정하는 이념이라서 공산당이 집권하면 반종교 정책을 펴지 않습니까? 처이발상은 도대체 불교 스님들과 불교지식인들을 얼마나 학살했나요?
란코프: 공산당정권은 어디에서나 종교를 위험한 반동세력으로 보고, 종교활동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그래도 나라별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유럽에서 뽈스카와 웽그리야와 같은 나라에서는 공산당 정부가 사실상 교회 활동에 눈을 감았습니다. 교회는 직접적으로 국가를 공격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몽골은 사회주의진영 국가의 기준으로도 매우 극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말 불교 관계자 대부분은 체포되거나 처형당했습니다. 물론 일반인들은 여전히 불교를 많이 믿었는데, 종교인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사원도 대부분 파괴되거나 문을 닫았습니다.
전: 그렇다면 처이발상 시대는 테러와 공포시대였나요?
란코프: 우리가 몽골인민공화국 역사를 보면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기술 발달입니다. 1930년대 말부터 처이발상정권은 소련에서 많은 원조와 지원을 받고, 그 전에 몽골에서 거의 없었던 공업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몽골 지하자원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했고,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광산 등을 많이 세웠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교육수준의 향상입니다. 몽골에서 글자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원래 불교스님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대부분의 몽골 어린이들은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 거의 없었던 병원, 의사 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매우 열악했던 생활수준도 1940년대부터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대 초 처이발상은 죽었습니다. 1953년 3월 이후 소련은 자신의 정치노선을 바꾸었는데, 몽골에 대해서도 많은 지원을 했습니다. 결국 1950-60년대 몽골에서 광산이나 규모가 작은 공장뿐만 아니라 큰 근대공장과 기업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또는 철도건설도 많이 활발해졌습니다.
전: 몽골인민공화국 역사와 관련해 소련을 여러 번 언급하셨는데요, 소련과 몽골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란코프: 원래 제정러시아도 소련도 몽골에 여러 번 간섭한 이유는, 이 지역을 완충지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39년에 몽골이 사실상 일본의 침략을 당했을 때, 소련은 대량 파병을 하고 사실상 이와 같은 침략을 성공적으로 가로막았습니다. 1941년에 제2차대전이 시작했을 때, 몽골은 독일에 전쟁선포를 했습니다. 물론 몽골은 유럽에서 너무 멀어서 독일과 만난 적도 없습니다. 선전포고는 상징적인 것이었지만, 몽골에서 나오는 자원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특히 당시에 소련군대가 매우 필요로 했던 겨울 옷은 주로 몽골에서 키운 양털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물론 철광석과 구리를 비롯한 몽골 지하자원은 거의 공짜로 소련으로 갔고, 1945년 소련의 승리에 많이 이바지했습니다. 제2차대전 직후에 소련은 드디어 몽골의 주권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전: 몽골의 주권 문제란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란코프: 1911년 몽골은 독립선언을 했는데, 국제적으로 주권국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소련은
몽골과 수교했고 대사관도 있었지만, 국제사회 앞에서는 몽골이 독립국가가 아니라 자치권이 많은 중국 영토라고 인정했습니다. 1945년에 소련과 중국은 옛 외몽골, 즉 몽골인민공화국을 주권국가로 인정하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전: 몽골이 마침내 주권국가가 되었다고 하셨는데요, 몽골 독재자 처이발상의 말로는 어땠습니까? 동유럽 일부 독재자들처럼 소련에 의해 숙청되었나요?
란코프: 아닙니다. 그는 스딸린이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952년에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었고, 그를 대체한 사람은 세덴발 수상입니다. 세덴발 수상은 당시에 벌써 힘과 권력이 많고, 1980년대까지 거의 30년동안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그의 부인은 러시아 여자였습니다. 소련에서 유학했을 때 결혼한 백인 여자입니다.
전: 세덴발 시대의 몽골은 어땠습니까? 처이발상 시대와 차이가 있었습니까?
란코프: 물론 차이가 있었습니다. 세덴발은 흐루쇼프 시대 소련의 새로운 정책을 열심히 지지했고,
감옥에서 아직 죽지 않은 정치범들을 대부분 석방시키고, 정치적 체포와 숙청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그는 외교를 잘 할 줄 알아서 소련에서 보다 더 많은 원조와 지원을 얻을 능력이 있었습니다. 제가 벌써 말한 바와 같이, 몽골은 1953-54년 이후에 소련에서 더 많은 지원을 받았고, 경제발전에도 인민생활 향상에도 많이 투자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몽골의 인구 증가입니다. 지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너무 높은 유아사망률과 짧은 평균수명 때문에 몽골민족이 소멸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있었습니다. 30여년동안 몽골의 인구는 80만 명에서 200만명까지,
거의 3배나 증가했습니다. 그 때문에 몽골 사람들은 처이발상이나 세덴발에 대해서 대체로 이중적인 태도입니다. 그들은 1932년에 집단화가 초래한 기근도 기억하고, 숙청도 기억하고 있지만 사회주의시대의 경제성장과 사회발전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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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