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 북조선에서 흐루쇼프 서기장만큼 비난을 많이 받는 러시아 사람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북한 선전 일꾼들은 그를 현대수정주의의 우두머리, 배신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날 러시아 사람들은 흐루쇼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란코프: 매우 모순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한편으로 보면 지금 러시아에서 흐루쇼프서기장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를 높이 평가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초래한 것은 당연히 수정주의가 아닙니다. 흐루쇼프의 혼란스러운 정책과 여러 개인적 특징입니다. 그러나 인기가 있는 이유도 있습니다. 흐루쇼프는 정치범 관리소를 사실상 폐지했습니다. 그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110만명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갇혀 있었지만, 10년 후에 수용소에 남아 있는 사람은 1000명뿐이었습니다. 109만 9000명이 수용소에서 풀려 났습니다. 제가 보니까, 정치 혁명이 발생하지 않은 나라에서, 이러한 변화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흐루쇼프는 매우 대단한 일을 했습니다.
전: 교수님, 그런데 흐루쇼프는 정치 개혁뿐만 아니라 소비생활 개선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던데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사실상 스딸린시대 소련정부는 소련인민들의 소비생활을 거의 완전히 무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급간부들의 극소수, 유명한 기술자나 학자, 그리고 예술인들은 잘 살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어렵게 살았습니다. 스딸린은 생활수준 향상을 결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부가 돈이 생기면, 모든 돈을 중화학공업이나 군수공업에 투자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련 군수공업에서 땅크도 나왔고, 많은 무기도 나왔습니다. 강철생산도 석유생산도 빠르게 증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땅크와 무기로 파쇼독일 군대와 싸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큰 대가가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 어떤 대가였나요?
란코프: 소련 인민들은 큰 대가를 치뤄야 했습니다. 고생이 참 많았습니다. 1930년대 초 400-500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1940년대 말 서부 러시아에서 다시 기근이 생겼습니다. 10-20만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매우 열악한 주택에서 살았고, 인구 대다수는 고기를 매주마다 한 번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1947년 이후 배급제는 폐지되어서 가게를 가면 물건과 식량이 있기는 했는데, 사람들의 소득이 너무 낮아서 살 수 없었습니다. 국가에서 주는 생활비는 너무 낮고, 장사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엄격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주택문제였습니다.
전: 그런데 교수님, 김일성 시대 북조선 인민들은 고기 맛을 보기가 참 어려웠는데요. 소련 인민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먹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적인 문제입니다. 스딸린의 집권 이전, 혁명 이후의 20년대 인민들은 보다 잘 먹었습니다. 스딸린의 사망 이후에 인민들은 과거보다 잘 먹기 시작했습니다.
전: 그렇군요. 흐루쇼프는 인민들의 소비생활 개선에 노력했다고 하셨는데요, 흐루쇼프 서기장이 편 정책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980년대 등소평의 중국과 비슷한 정책이었나요?
란코프: 사뭇 다릅니다. 등소평은 권력을 잡은 다음에 사실상 사회주의를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죽을 때까지 국가사회주의를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의 승리를 믿었는데요. 그래서 그는 생활수준 개선을 위해서 매우 사회주의적인 방식을 썼습니다. 스딸린 시대 군수공업이나 중화학 공업에 많이 투자했던 국가 예산은 경공업에 투자되거나, 해외에서 식량과 소비품을 외화로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스딸린 시대 국가 돈으로 폭격기나 대포를 만들던 돈으로, 이제 냉장고와 라디오 수신기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흐루쇼프 서기장은 군수공업을 완전히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륙간 미사일 개발을 열심히 했고, 핵개발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논리는 핵무기를 가지게 된다면 절대적인 억제수단이 생기기 때문에, 원래 국방비로 쓰던 막대한 돈을 이제 인민생활 수준 향상을 위해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 교수님, 흐루쇼프의 핵무기 논리는 김정은의 논리와 비슷해 보이는데요.
란코프: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현 단계에서 김정은이 이 길로 갈 수 있을지 알기 어렵습니다. 간다고 해도 성공할 지 의심스럽습니다. 김정은의 할아버지가 매우 미워했던 흐루쇼프는 이 길로 갔을 뿐만 아니라 큰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그래도 흐루쇼프의 정책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흐루쇼프는 국가사회주의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성과라고는 별로 없는 사회주의식 농업에서 개혁을 할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전: 그런데 교수님, 흐루쇼프 시대에 인민들이 보다 더 잘 먹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농업개혁도 없는데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란코프: 1960년대 초부터 소련은 해외에서 알곡을 비롯한 곡물을 수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흐루쇼프를 비롯한 소련지도부는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요? 스딸린 시대 기근에 빠진 마을에서 국가는 힘으로 알곡과 식량을 뺐고, 몰수했고, 해외로 수출하고, 이렇게 얻은 돈으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흐루쇼프 시대 국가는 국제시장에서 무기나 강철, 여러 완성품이나 지하자원을 팔고, 이렇게 얻은 외화로 인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알곡과 기타 식량을 수입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흐루쇼프 서기장의 노선의 성격을 잘 표시하는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전: 소련 인민들은 해외에서의 곡물 수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란코프: 솔직히 말해서 약간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소련은 북조선처럼 정보가 완전 통제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민들은 알곡수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흐루쇼프시대 생활수준이 빠르게 향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이 변화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생활비와 기타 소득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제도는 연금입니다.
전: 연금이라면 연로보장과 같은 것인가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스딸린 시대 소련에서 나이가 많을 때 국가에서 연로보장을 받을 사람들은 군관, 간부, 학교 교원 및 대학교수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초 들어와 흐루쇼프 서기장 덕분에 여자는 55세, 남자는 60세가 되면 그 때까지 받았던 월급의 절반, 즉 50%의 연로보장금을 누구든지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주민들의 생활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러시아 사람들에게 흐루쇼프 서기장의 10년은 생활이 제일 빠르게 좋아지고 있던 시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2000년대 초 푸틴 대통령의 집권 초기에, 매우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소비 생활 개선에 있어 제일 중요했던 것은 주택 정책입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