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의 후계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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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최근에 김정은 위원장의 건강에 문제가 많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공산주의 국가의 역사를 보면, 소련이든 중국이든 최고지도자에게 문제가 생기면 후계자를 어떻게 정했나요?

란코프 교수: 사실상 후계자 문제는 소련식 정치구조에서 제일 큰 약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최고지도자라고 해도 인간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몸이 많이 아플 수도 있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모든 국가는 최고지도자가 많이 아프거나 사망했을 때 필요한 권력이양을 설명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최고지도자가 사라진다면 새로운 지도자가 어떻게 등장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절차는 수천년 전부터 있었는데요. 당연히 봉건주의 시대에 왕의 아들이나 친족이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왕이 죽을 때까지 후계자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경우에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왕의 수많은 아들딸, 조카, 형제 등 가운데 다음 왕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 나라의 법에 따라서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민주국가는 선거에 따라서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이러한 체제가 없었습니다.

기자 : 공산국가에서는 정치국도 있고 당중앙 전원회의도 있는데요. 이런데서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나요?

란코프 교수: 말로만 그렇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후보 몇 명이 공개적으로 경쟁하는 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중앙 전원회의나 대표자회의와 같은 모임은 말로만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했습니다. 후보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참가자들은 아무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그 때문에 새 지도자에 대한 선택은 소수 고급 간부들이 극비리에 정했습니다. 수많은 경우 파벌들은 심하게 대립했고, 무기를 쓰거나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기자 : 파벌들은 무력충돌을 하고 서로 죽인 적까지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 그들이 서로를 직접 죽인적은 없는데,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서 정치국 회의에서 반대파를 즉시 체포하고 비밀감옥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스딸린 사망 직후에도, 모택동의 사망 직후에도 이러한 일이 생겼습니다.

기자: 1953년 소련이나 1976년 중국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1953년 3월 스딸린은 죽었습니다. 당연히 그 후에 고급 간부들 가운데 개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선전일꾼들이 열심히 비난하는 흐루쇼프, 그리고 북한에서 극찬을 받는 스딸린시대의 외무상 몰로토프, 그리고 1945년 제2차대전에서의 소련군대 승리를 지도한 주코프 원수가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과 대립한 사람은 국가보위성 책임자인 베리야입니다. 당연히 그들 모두 다 매주 정치국 회의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베리야가 정치국에 도착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소련군대 장성 몇 명은 갑자기 그를 마구 때리고 수갑을 채웠습니다. 그 후에 소련 보위성 책임자 즉 최고 보위원 베리야는 수갑을 찬 채 소련군대 기지로 보내졌습니다. 소련군대는 국가보위성을 너무 싫어했기 때문에, 베리야가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베리야는 비공개 재판을 받고 곧 처형되었습니다.

기자 : 소련 최고 보위원은 북한 국가보위상만큼이나 하루아침에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는데요.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솔직히 말해서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국가의 역사를 보면, 고급 보위원들은 진짜 매우 위험한 인생을 살았고, 대부분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중국으로 갑시다. 1976년 9월 모택동의 사망 이후 중국에서 생긴 일은, 1953년 소련에서 생긴 일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당시에 화국봉을 비롯한 고급간부들과 모택동의 부인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은 대립했습니다. 화국봉은 군대의 지도자 섭검영과 손을 잡고 4인방 체포를 결정했습니다. 흥미롭게도 화국봉이 선택한 방법은 소련에서 흐루쇼프와 주코프가 선택한 방법과 똑같습니다. 4인방 중 3명이 정치국 회의장에 도착하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군인들은 3명을 공격하고, 체포하고, 수갑을 채우고 4인방은 혁명의 배신자라고 선포했습니다. 모주석의 부인 강청은 회의장 대신에 자기 저택에 있었는데요. 인민해방군 부대는 강청이 사는 저택을 포위하고 그녀를 체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강청은 비교적 별 반항을 하지 않고 침착하게 체포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중국을 통치할 꿈을 꾸던 4인방은, 모주석이 숨을 거둔지 28일 만에 감옥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기자 : 1953년 소련이든, 1976년 중국이든 평화스러운 권력이양보다는 정변이 생겼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공산국가에서 평화로운 권력이양 제도는 아예 없었나요?

란코프 교수 : 사회주의 시대에 동구국가들은 독립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동구국가 지도자들은 소련에 의해서 임명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이들 나라에서 심한 권력투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대사가 보이지 않게 통치하지 않는 나라라면, 즉 소련, 중국,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나라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생길 때마다 매우 심한 위기가 생겼습니다.

기자 : 그런데 교수님, 공산권 지도자들은 이러한 불안한 상황을 해결할 생각이 없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 당연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도한 방법은 하나뿐인데요. 즉 지도자가 살아있을 때 나중에 자신을 대체할 후계자를 임명하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모택동은 1960년대말 중국군대를 사실상 지휘했던 임표를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공식 문서에서 이 사실을 세계에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매우 심한 역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임표는 모주석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고, 음모를 꾸몄고 모택동을 타도하기 위한 정변을 시도한 것 같습니다. 1971년, 정변이 실패하자 임표는 중국과 적대관계이던 소련으로 도망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임표 사건에서 공산권 지도자들이 배운 교훈은, 사전에 임명된 후계자는 지도자의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에 오히려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 : 김일성이 임표 사건에서 많이 배웠고, 그 때문에 정권 세습을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란코프 교수 : 네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 후계자는 무조건 전임지도자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논리가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격할 가능성은 완전히 없지 않아도 매우 낮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지도자가 된다면, 자기 아버지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세습정치를 한 공산국가들이 거의 없습니다. 공산주의사상과 매우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자: 네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