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내부의 망명자들

0:00 / 0:00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남한에서는 탈북자의 수가 34,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에 남한으로 망명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얼마 전 남한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했는데요. 과거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망명자들을 어떻게 취급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공산권은 강철과 같은 내부단결을 운운했지만, 사실상 내부 갈등과 대립이 많았습니다. 물론 제일 중요한 충돌은 중국과 소련의 대립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대립이 아니었습니다. 대립이 생길 때 공산주의 국가들은 경향이 다른 공산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했습니다.

기자: 앞서 교수님과 소련을 탈출한 망명자들에 대한 내용을 다룬 적이 있는데요. 소련으로 입성한 외국 망명자들을 소련정부는 환영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 외국이 아니라 사회주의 진영 내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 역사는 1948년부터 시작합니다.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와 그 지도자인 티토는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에 도전하였습니다. 스탈린은 그의 명령을 무시하는 티토원수에 많이 분노했고, 소련이 손가락만 움직여도 티토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착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소련에서는 티토와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제국주의졸개이며 파쇼집단, 살인가 집단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측도 스탈린이 미친 살인마이며 소련공산당은 사회주의를 배신한 부패한 집단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소련과 소련이 통제하는 동구국가들은 유고슬라비아를 대상으로 심리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소련에서 유학했던 유고슬라비아 학생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이 귀국하는 대신에 소련공산당과 소련정보기관과 협력하고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티토와 유고슬라비아의 공산당이 싸우도록 했습니다.

기자: 소련당국의 노력은 어느정도 성공했을까요? 티토원수를 비난하면서 스탈린에게 충성을 선언하고 소련에 망명한 학생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란코프 교수: 이러한 사람들은 570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련공산당을 지지하고 유고슬라비아에 공작원으로 파견될 준비를 했습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내부에도 그런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특히 1920년대 입당했던 공산당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국내에선 도망치기 어려웠지만, 해외에 있던 유고슬라비아 간부들은 티토를 비난하고 전향선언을 한 다음에 소련으로 넘어가곤 했습니다. 예를들면 웽그리아(헝가리)주재 유고슬라비아 대사도 그렇습니다.

기자: 소련측은 과거 유고슬라비아에서 망명온 사람들에게 막대한 보상 또는 좋은 자리를 내주거나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사상 문제였습니다. 웽그리아 대사였던 골루보위치 대사는 소련에서 티토와 유고공산당을 비난하는 신문 편집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1950년대 들어와 스탈린 사망 직후, 소련과 유고슬라비아 관계가 많이 좋아졌습니다. 나중에 약간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서로 형제국가라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은 반유고슬라비아 활동 지원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활동을 금지했습니다. 반티토원수 활동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들은 티토원수를 지지했기 때문에 소련으로 간 망명자들을 매국노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련에서 조용히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소련 국적을 받을 경우에도 소련공산당이나 국가기관에서 출세할 희망조차 없었습니다. 의심스러운 출신성분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기자: 네 교수님, 지금까지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소련으로 망명한 사람들을 살펴보았는데요.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북한에서 온 망명자들도 많았습니다. 허가이와 박창옥과 같은 사람들, 즉 소련공산당 간부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1950년대말 김일성이 소련공산당 출신 간부들을 숙청하기 시작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은 북한을 떠나 소련으로 귀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 원래부터 소련 국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별로 시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에 소련파 출신자들의 아들딸은 소련에서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정치, 사업, 과학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소련파 출신자들 중에 소련으로 귀국한 이후에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은 북한에서 건설상을 지냈고, 1956년 8월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에 도전했다가 소련으로 망명한 김승화 뿐입니다. 그는 소련에서 인기가 많은 교수가 되었습니다.

기자: 소련 출신이 아닌 북한 간부들이 소련으로 도망친 사건도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러한 사례는 수십개 정도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사례는 1957년 모스크바 대사였던 이상조의 망명 사건입니다. 그는 원래 중국공산당 간부로 활동했고, 연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소련에서 보호를 받으면서 잘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과 기타 동유럽 국가에서 유학했던 북한 학생들은 15-20명 정도 귀국을 거부했고 소련이나 기타 동유럽 국가에 망명했습니다. 그들도 대체로 잘 살았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공산권에서 제일 심하게 대립했던 중국과 소련 사이엔 망명자가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1960년대초부터 80년대 말까지 거의 30년간 중국과 소련은 심하게 대립했고, 무력충돌까지 있었습니다. 중국 고급간부가 소련으로 망명한 사건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1930년대 초에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왕명입니다.

기자: 총서기라고 하셨나요? 공산당 최고책임자였던 왕명 말인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30년대 초 모택동은 왕명의 밑에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왕명을 위험한 경쟁자라고 생각했고, 그의 영향력을 없애기 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1956년에 왕명은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이유로 소련으로 떠났습니다. 크렘린 궁전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다는 이유였는데, 왕명은 자신이 중국에 있는다면, 자신을 싫어하는 모택동이 곧 처형 명령을 내릴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으로 망명한 그는 1974년까지 잘 살았는데요. 물론 그는 소련언론에 종종 등장해서,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들이 혁명의 배신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도 있을까요?

란코프 교수: 없었습니다. 소련과 중국이 심하게 대립했을 때에도, 소련국내에서 모택동식 사회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간부이든 반체제 인사이든 중국으로 망명할 생각이 아예 없었습니다. 중국에서 왕명 총서기와 같은 고급 간부뿐만 아니라 지식인들, 그리고 하급간부들이 소련으로 갔는데, 규모는 수백 명 정도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가 1980년대 소련에서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을 다닐 때, 교수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이 두 명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 위구르족 사람들은 1960년대초 중국에서 심한 차별을 당하기 시작하자 소련으로 갔습니다. 그들 가운데 간부나 지식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거의 없고 다 평백성들입니다. 그래도 소련에서 직업을 얻고 나름 잘 살았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