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의 역사 (1)

0:00 / 0:00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교수님, 요즘에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매일매일 심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정치인들은 중국공산당을 많이 비판하고 있고, 세계 언론은 오늘날 미중 갈등을 '신냉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은 처음부터 적대 관계였을까요?

란코프 교수: 아닙니다. 훨씬 복잡합니다. 오늘날보다 더 심한 적대관계였을 때도 있었고, 사실상 손을 잡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중 관계는 처음부터 살펴보면 좋습니다.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은 1940년대 중국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웠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대부분은 미국이 장개석과 국민당을 열심히 지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기자: 앞서 미국은 왜 반공 진영인 장개석 총통과 국민당을 도와주지 않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솔직히 말해서 1940년대 국민당은 민주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국민당을 지지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1945년 제2차대전 승전 이후 미국은 얼마 동안 국민당을 많이 지지하였습니다 . 그러나 당시에 국민당은 정말 매우 심한 비리와 부정부패가 있었습니다. 국민당 간부들은 미국에서 나온 원조를 많이 훔쳤고, 믿기 힘들지만 수많은 경우 미국에서 온 무기들은 공산당에게 흘러갔습니다.

기자: 정말로 사실인가요? 국민당 간부와 장성들은 자신들을 죽이려는 공산당에게 미국이 준 무기를 팔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국민당 간부들은 공산당측에 돈을 받고 무기를 팔고, 비리를 저질러 번 돈으로 호화스러운 집을 지었습니다. 미국측은 이것을 보고 경고를 많이 했지만, 아무 결과가 없었습니다. 국민당 고급 간부들, 특히 그들의 부인들과 그 가족들은 더 많이 비리를 저질렀습니다. 결국 미국은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미국에서 지원이 중단되었고, 국민당은 심한 비리 때문에 중국 백성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장개석과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패배했고, 마지막 순간에 대만으로 도망갔습니다.

기자: 그런데 교수님, 냉전시대 미국은 공산당을 열심히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미국 정부는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해도 좋다고 생각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얼마 동안은 짧은 기간이라고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미국에서 강경파는 국민당 패배에 대한 책임을 트루먼대통령과 일부 외교관에게 돌렸습니다. 미국의 강경파는 그들이 무능한 외교관일 뿐만 아니라 배신자나 소련간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얼마 동안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미국에서 국민당은 구제불능의 집단이라고 생각되어서, 아무도 국민당을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말씀을 듣고 보니 국민당은 진짜 문제가 많았던 것 같은데요. 그들은 대만으로 도망쳤습니다.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은 대만을 공격할 계획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랬습니다. 그들은 상륙작전까지 준비하고 있었고, 국민당은 대만 섬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미국측은 국민당을 포기했고, 장개석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습니다.

기자: 하지만 국민당은 살아남았습니다.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제일 중요한 변화는 한국전쟁입니다. 우리가 지금 공개된 소련 비밀자료와 중국의 비밀자료를 다 볼 수 있는데요. 남침은 김일성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은 소련이나 중국의 동의 없이 남한을 공격할 수 없어서, 몇 년 동안이나 남침 허락을 받으려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까지 이것들은 모두 극비에 부쳐 있었고, 그 때문에 반공 진영에서는 남한에 대한 공격은 바로 스탈린의 지시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이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반공국가들을 도와주는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대만에서 고립된 장개석 정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은 대만을 지키기 위해서 함대를 파견했습니다. 1950년대초 이야기입니다. 물론 중국은 오늘날도 미국해군과 싸우기 어려운데, 당시에 미국 해군과의 전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미국은 국민당 정권과 동맹을 맺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50년대부터 미군은 대만에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가 없었습니다. 남북한과 달리, 중국과 대만은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북경에 대사관이 있는 나라이면, 대만 수도인 대북에 대사관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까지 서방 국가는 거의 모두 대북에 대사관이 있었고, 북경에는 대사관이 없었습니다. 예외는 영국인데요. 영국은 홍콩 문제 때문에 거의 즉각적으로 모택동의 중국을 인정했습니다.

기자: 당시에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열심히 싸웠는데요. 서로 간에 적대감이 많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미중관계는 1950년대 말 제일 나빴습니다. 당시에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을 많이 비판했는데, 중국측은 소련이 미국을 충분히 많이 반대하지 않아서 큰 잘못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 중국은 세계 모든인민들, 특히 발전도상국 인민들은 미국을 반대해야 한다고 시끄럽게 주장하였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미국과 중국공산당 정권은 아무 외교 관계가 없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1960년대 중엽까지 그렇습니다. 당시에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중이었고, 미국에서 공산당 중국의 이미지는 미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말부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미국과 중국은 제3국에서 접촉을 시작하였습니ㄷ. 흥미롭게도 당시에 그들이 제일 많이 접촉한 곳은 뽈스카(폴란드)입니다. 당시에 뽈스카에게 미국도 중국도 둘 다 적대국가였습니다.

기자: 대립하던 미중 양측은 왜 회담을 시작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국제 정치인데요. 국제정치에서 사상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국가 이익입니다. 당시에 소련과 중국 관계는 많이 나빠졌습니다. 국경에서 소련군대와 중국군대가 무력 충돌까지 벌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냉전시대 한국전쟁 이후에 소련군대와 미국군대가 직접 싸운 적이 없습니다. 당시에 미국은 소련에 반대하는 중국과 관계를 맺을 생각이 생겼습니다. 중국측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흥미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중국 지도부와 고급군인들은 소련에 대한 적대감과 공포가 매우 컸습니다. 관계는 빠르게 개선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69년 미국 에서 새로 취임한 닉슨대통령은 중국에 관심이 많았는데요. 닉슨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출신인데, 그는 태평양 지역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당시에 미국에서 닉슨대통령은 극한 반공 우익 인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중국과 관계를 개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