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청년동맹 ‘콤소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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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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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주의 청년동맹 , ' 콤소몰 '>

- 공산주의 국가에서 조직된 청년동맹

- 1910년대 혁명과 내전의 승리에서 크게 이바지

- 콤소몰의 대중화 이후 조직과 사상에 큰 영향 못 미쳐

- 1960~70년대 이후 조직 생활 약화,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해

'콤소몰'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공산주의 청년동맹을 일컫는 말인데요. 북한에서도 청년동맹이란 조직이 있죠. 사회주의∙공산주의 진영의 국가 중에서 청년동맹이 없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콤소몰'이 공산당 조직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은데요. 오늘은 콤소몰의 역사와 조직, 활동 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원래 구소련에서 공산당뿐 아니라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요.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은 어땠나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있었습니다. 북한이나 불가리아 등을 비롯한 모든 공산 국가는 구소련의 정치 구조를 모방했습니다. 당연히 이들 국가는 다른 부문에서도 소련을 흉내 냈습니다. 소련에서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도 비슷한 조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북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에서 청년단체의 이름은 ' 김일성 김정일주의 청년동맹 ' 입니다 . 이것은 원래 소련의 청년동맹 이름과 똑같습니다. 원래 소련에서 청년동맹의 공식 이름은 ' 레닌공산주의 청년동맹 ' 이라고 했습니다 . 약칭은 ' 콤소몰 ' 입니다 . 이 시간에 이 약칭을 사용할 텐데요. 애초 북한의 민청, 즉 사로청은 소련의 콤소몰을 모방해 복제한 기관입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소련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서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의 나라 중에 청년동맹이 없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소련의 콤소몰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란코프 교수] 정확하게 말하면 콤소몰이 시작된 날은 1918년 10월 29일입니다. 이날 모스크바에서 콤소몰 제1차 대회가 소집됐습니다. 당시 창시자는 젊은 공산당 간부였던 샤츠킨입니다.

- 창시자 샤츠킨은 나중에 어떻게 됐나요? 최고위급 간부까지 승진했나요? 아니면 숙청됐나요?

[란코프 교수] 먼저 고급 간부가 됐지만, 나중에 모스크바 감옥의 지하실에서 총살됐습니다. 이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10월 혁명을 이끈 사람들 대부분은 훗날 내부 다툼 때문에 제거되거나, 아니면 1930년대 말 스탈린의 대숙청 때 죽임을 당했습니다.

- 교수님. 1910~20년대에 콤소몰은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란코프 교수] 첫 단계의 콤소몰 역사를 보면, 1910년대 말에 있었던 혁명과 내전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콤소몰 간부들은 혁명운동에 많이 참여했고, 14~15살 정도의 젊은이에게 선전 선동을 많이 했습니다 . 공산당의 승리에 많이 이바지했습니다. 공민 전쟁 이후 1920~30년대에도 콤소몰은 여전히 중요했습니다. 당시 콤소몰에 입맹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사상을 정말로 믿거나, 공산당 간부가 될 꿈을 꾸었습니다. 또 콤소몰 사람들은 간부뿐만 아니라 일반 맹원들의 열망이 매우 컸고, 공산주의 선전을 많이 했으며, 여러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할 의지가 있었고, 정치적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을 별생각 없이 쉽게 죽일 의지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상황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변화의 기본적인 이유는 콤소몰의 대중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교수님. 대중화는 어떤 의미인가요?

[란코프 교수] 1920년대에 콤소몰은 정말 무서운 극좌익 단체였습니다. 하지만 1920~30년대에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소련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공산당 정치의 큰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때부터 젊은 사람은 중학교에 거의 자동으로 입학하기 시작했고, 결국, 1940년대말부터 14살이 된 청년들은 대부분 자동적으로 콤소몰에 입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콤소몰 입맹은 개인의 세계관이나 개인의 정치신념과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됐습니다.

- 그렇다면 소련 정부는 왜 콤소몰을 대중화시켰나요? 이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었습니까?

[란코프 교수] 소련 당국자들은 모든 청년이 콤소몰에 입맹한다면 모두 다 좋은 사상교육을 받고, 공산당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더 커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달리 구소련은 조직 생활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에서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공산당과 콤소몰뿐입니다. 성인 대부분은 조직 생활이 아예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당국자들은 콤소몰에서 젊은 사람들이 사상교육을 받으면 , 늙을 때까지 영향이 받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콤소몰의 조직 생활은 젊은 사람의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1940년대 이후 콤소몰은 1910~20년대와 달리, 콤소몰 입맹은 개인의 사상이나 의지와 관계없던 일입니다. 물론 청년동맹 간부들은 훗날 공산당 간부가 될 희망이나 가능성이 컸습니다. 1940년대 이후 소련 공산당 간부들의 배경을 보면 경제일꾼 출신도 많지만, 대부분 젊었을 때 30대 중반까지 콤소몰 간부로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고르바초프도 콤소몰 간부 출신이었는데, 원래 콤소몰의 도 비서였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사람들은 콤소몰에서 몇 살까지 활동했나요?

[란코프 교수]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애초 14세부터 23세까지 가능했는데 나중에는 28세까지 있었습니다.하지만 간부들은 30대 후반, 고급 간부는 40대 초까지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 1960~70년대에 콤소몰은 어떤 활동을 하였나요?

[란코프 교수] 대부분 공산당 조직 생활을 모방했지만, 이보다 훨씬 더 가벼운 조직 생활을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북한의 청년돌격대와 같은 활동도 있었습니다. 소련에서는 청년건설대라고 했습니다. 이곳에서 활동한 사람은 모두 다 대학생인데, 여름에만 갔습니다. 하지만 북한과 달리 인기가 매우 높았습니다. 북한의 청년돌격대와 달리 구소련의 청년건설대는 돈을 잘 받았습니다. 몸이 좋고 기술이 있는 사람이면, 여름에 두 달 반 정도 열심히 일 해도 1980 년대 기준으로 1 루블 정도를 있었습니다 . 당시 가치로 절약해서 살면 1 정도 생활할 있는 돈입니다 . 하지만 대체로 콤소몰 맹원들은 자신의 조직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

- 교수님. 간부들도 그랬나요?

[ 란코프 교수 ] 당연히 그렇습니다 . 1960 년대 이후 콤소몰 간부들은 그냥 공산당 간부 후보였습니다 . 흥미롭게도 1980 년대에 들어와 그들의 머리가 아직 굳지 않았고 , 능력과 힘이 공산당 간부들보다 먼저 자본주의 시장경제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1980 년대에 소련에서 콤소몰 간부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개척자가 됐다고 있습니다 . 흥미롭게도 현재 러시아의 고급공무원들 가운데 콤소몰 간부 출신자들이 정말 많습니다 . 절반 이상이라고 있습니다 .

- 그렇군요.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소련 콤소몰의 역사와 조직 구성, 활동 등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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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