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해외 이민 역사

0:00 / 0:00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소련의 해외 이민 역사>

- 공산권 국가들 , 자국민의 해외 이민에 부정적

- 소련 , 1930 년대부터 합법적 이민 불가능

- 스탈린 사망 이후 국제결혼 해외 이민 재개

- 스탈린 후손 가운데 미국 시민권자도 있어

오늘날 많은 사람은 조국을 떠나 외국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갑니다.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나는 개인의 선택인데요. 이민이라고 하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이민이 자유로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민을 제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은 소련의 이민역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공산권 국가들은 자기 나라 국민이 해외 이민을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는데요. 사실인가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그렇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이민을 나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상적으로 말하면 공산권 국가들은 자기 나라를 민중이 잘 사는 낙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낙원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습니다 . 첫째, 공민들이 해외로 간다면 고향에서 친구, 친족 등이 남아있기 때문에 친족과 가족들은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해외 생활에 대해서 배울 기회가 많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공산권 국가는 국민들이 해외 생활을 많이 배우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민을 하고 싶은 사람 대부분은 좋은 교육을 받은 고학력자들입니다. 그들이 해외로 가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에 손실을 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교수님, 사회주의의 모범국가로 볼 수 있었던 소련은 왜 주민들이 해외로 가지 못하게 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합니다. 왜냐하면, 시대별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1920년대 말까지 소련 공민들은 해외로 이민 갈 마음이 있으면 공식적으로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이민 허가를 받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래도 1930년대 초까지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합법적으로 이민을 할 수 없게 됐고, 이런 계획을 세운 사람까지도 조사를 받거나 체포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 교수님, 그런데 지금 미국이나 유럽에는 수십 년 전에 구소련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란코프 교수] 물론 소련에서도 해외로 이민 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합계는 300~400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소련 사람들의 이민에는 두 개의 큰 파도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혁명 이후 내전이 끝나자, 패배한 반공주의자들이 많이 망명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반공 사상이 강한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이민을 간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파도는 1940년대 말입니다. 당시 파쇼 독일이 강점한 지역에서 강제 노동을 동원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럽으로 파견된 노동자들 가운데, 1940년 이후 귀국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유럽 생활의 맛을 알게 됐고, 다시 스탈린 시대의 소련으로 돌아가기 싫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파쇼독일과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원래 유럽에서 살았는데, 나중에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많이 갔습니다.

- 교수님, 그렇다면 1950년대 이후 소련의 이민 역사는 어떤가요?

[란코프 교수] 1940년 이후 소련에서는 이민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거의 10년 동안 외국인과의 결혼, 즉 국제결혼도 금지됐습니다.

- 교수님, 북한 사람들도 외국인들과 결혼할 생각을 할 수조차 없는데요. 소련에서는 예전에 국제결혼이 가능했나요?

[란코프 교수] 가능했습니다.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다시 합법화되고, 당시 외국인과 결혼한 소련 사람들은 외국인 남편이나 부인을 따라 이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민을 제일 많이 떠난 사람은 일부 소수민족입니다. 특히 유대인과 독일계 소련 사람들은 이민이 가능했습니다.

- 스탈린 시대에는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란코프 교수 ] 합법적으로 1945 년까지 가능했습니다 . 그러나 당시 외국인과 사귀던 소련 국민은 거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 외국인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감옥에 소련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 하지만 1940 년대 소련은 미국 , 영국과 군사동맹 관계를 맺었는데 그때에는 이들 국가 출신과 결혼하고 합법적으로 해외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 흥미롭게도 스탈린의 딸도 1960 년대에 인도사람과 결혼해 합법적으로 해외로 갔습니다 . 그녀는 미국으로 갔습니다 . 오늘날 스탈린의 후손 가운데 미국에서 미국 시민권자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 그렇다면 1950년대 이후 소련에서 해외로 이민을 가는 방법은,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뿐이었나요?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

[ 란코프 교수 ] 방법이 있었습니다 . 소수민족 일부는 사실상 이민을 신청할 권리가 사실상 있었습니다 . 예를 들어 유대인이면 합법적으로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 독일계 소련 사람들은 동독뿐 아니라 , 심지어 서독까지도 있었습니다 . 물론 당시에도 해외로 가고 싶은 사람이면 매우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 특히 이스라엘로 가고 싶었던 유대인 국가 비밀을 있는 사람이면 이민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 때문에 군수공업 기술자나 군인 , 경찰과 같은 사람은 이민을 없었습니다 .

뿐만 아니라 이민을 신청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압박이 가해졌습니다 . 소련에서는 북한과 달리 조직 생활이 사실상 없었는데 , 그래도 이민을 희망한 사람들이 다니는 기업소나 학교에서는 그들을 많이 비판하거나 차별도 심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0 년대에 이스라엘에 이민을 소련 출신자들은 10 정도입니다 . 그들 대부분은 유대민족주의 때문에 갔거나 , 자유를 찾아서 갔다고 주장했습니다 .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있는데 , 기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발전된 경제입니다 . 당시 이스라엘의 생활 수준은 소련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

- 그렇다면 소수민족이 아닌 러시아 사람들은 소련 시대에 해외로 이민을 할 수 있었을까요?

[ 란코프 교수 ] 쉽지 않았지만 , 가능했습니다 . 제일 많이 있었던 방법은 유대인이나 독일계 남편 혹은 부인을 따라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 당시에 이런 농담까지 있었습니다 . 유대인 부인이 제일 좋은 국제 교통수단이라는 것입니다 . 유대인 자격으로서 해외로 소련사람들 가운데 4 분의 1 정도는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 유대인의 친족이나 가족입니다 .

- 교수님, 마지막으로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 이민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 란코프 교수 ] 1990 년대에 러시아 사람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해외로 나갈 있게 되었습니다 . 단기 여행으로 수도 있고 , 해외에서 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민을 수도 있습니다 .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었습니다 .

네. 오늘은 소련의 해외 이민 역사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도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