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 고르바초프 총비서 등장과 정책 (2)>
- 1970~80 년대 소련 국민 , 변화에 대한 의식 공감
- 극과 극을 오갔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
- 경제위기 극복 위해 술 소비도 엄격하게 제한
-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취한 시장화와 정치개혁은 ?
'변해야 한다'는 국민의 열망을 등에 업고 소련의 지도자로 등장한 고르바초프 총비서. 하지만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시장화와 정치개혁을 시행하긴 했지만, 정책 시행의 극과 극을 달렸는데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과 정책에 대해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 우리는 1970-80년대 소련의 내부상황을 살펴봤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소련 국민은 일반 사람이든 간부이든 모두 다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셨고요.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등장이 바로 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은 어땠나요?
[ 란코프 교수 ]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1980 년대 들어와 소련 사람들은 모두 나라의 모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대로는 살 수 없다는 인식이 당시 소련의 정치와 사회 분위기를 결정했습니다 . 그대로 사회주의에 대한 불만은 있었지만 , 사회주의를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 사회주의를 개량하는 것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 서로 대립하는 몇 개의 제안들이 있었고 , 한편으로 국민 대부분은 웽그리아 ( 헝가리 ) 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처럼 독립채산제 , 기업관리제를 많이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또 일부 간부들은 국가의 감시능력과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하지만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잘 몰랐고 , 1985 년 4 월에 취임한 이후 1987 년까지 서로 엇갈린 두 개의 정치 노선을 거의 동시에 시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교수님.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몰랐다는 것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마치 선장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배를 출발시킨 것 같은데요. 이것은 아주 불안한 현상이 아닐까요?
[ 란코프 교수 ] 이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당시 고르바초프 총비서뿐 아니라 대부분 소련 국민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 독립채산제와 기업관리 책임제는 국가통제의 강화와 함께 이뤄질 수 없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정책은 극과 극을 오갔습니다 . 나라를 어떻게 바꿔야 할 지 사실 아무도 몰랐습니다 .
- 그렇다면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정책을 펼쳤나요?
[ 란코프 교수 ] 1986 년에 모든 기업소에서 국가품질검사소가 생겼습니다 . 러시아말로 ' 고스프리욘카' 입니다 . 이전에 군수 산업에만 있었던 제도인데 , 바꾸어 말하면 기업소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이 기업소에서 만든 완성품이나 제품을 검사하고 , 품질 수준이 표준에 맞지 않았을 때는 공장으로 물건을 돌려보냈습니다 . 이것은 매우 대표적인 구식 방법입니다 . 즉 ,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경제를 만들기 보다 , 또 하나의 국가감시를 시작했습니다 .
동시에 1985 년 ,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술 소비를 줄이기 위해 매우 엄격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 술 가격이 많이 올라가서 술을 판매할 수 있는 상점이 많이 없어졌고 , 술을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시간제한도 생겼습니다 . 매일 몇 시간뿐이었습니다 . 당시 술을 많이 마시던 소련 사람이 많은 불만을 표출한 정책이었습니다 . 그런데 1986 년 , 소위 말하는 개인 노동법이 동시에 채택됐습니다 . 개인 노동법은 사실상 중소기업에서 개인회사를 허용했습니다 .
- 교수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왜 술 판매를 이만큼 엄격하게 제한했나요?
[ 란코프 교수 ] 당시 러시아 사람은 술을 참 많이 마셨습니다 . 오늘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마셨습니다 . 많은 사람이 지나친 술 소비가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한 것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 때문에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술 소비를 줄인다면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 소박한 생각이었지만 , 당시에 지지자가 많았습니다 . 당시 술에 많이 취해있던 일반 국민은 불만이 컸습니다 .
- 또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취임하자마자 시장화와 정치개혁을 시작했다고도 알려져 있는데요. 어떤 일을 했나요?
[ 란코프 교수 ] 조금 전 개인 노동법을 말씀드렸습니다 . 개인 노동법은 당시 많은 사람 , 특히 많은 지식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경제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 1970 년대부터 서유럽 생활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지식인과 일부 간부들은 소련에서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대부분이 여전히 국가기업소로 남아 있어도 , 식당이나 구두수리소 등 소규모 기업들은 개인소유가 되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들은 국가가 봉사사업을 잘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 물론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 그들은 소규모 개인회사를 허용한다면 , 불편한 점이 많았던 소련 생활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 그렇다면 교수님. 1986년부터 소련에서 개인회사가 허용된 건가요?
[ 란코프 교수 ] 물론 아닙니다 . 이러한 개인회사는 노동자를 고용할 권리조차 없었습니다 . 주인과 그 가족들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 나중에 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게 됐지만 , 그들은 종업원들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 당국자들은 이러한 회사들을 협동회사라고 주장했습니다 . 노동자들도 주인이라는 주장입니다 . 물론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 사실상 1986-87 년 이후 이전에도 소련에 존재했지만 , 매우 약했던 ' 돈주' 라는 사회계층이 다시 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개인 노동법 말고, 다른 시장화 조치는 어떤 것이 있었나요?
[ 란코프 교수 ] 1987 년 소련은 기업소책임 관리제를 도입했습니다 . 특히 대기업은 직접 다른 기업소와 주문계약을 만들 권리도 받았고 , 무역회사를 독립적으로 창업할 권리도 얻었습니다 . 책임관리제 기업소들은 노동자들을 필요에 맞게 고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많은 월급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 당시에 잘 알 수가 없었지만 , 이것은 명령식 사회주의 경제의 종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기업소들은 빠른 속도로 국가의 통제와 감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동시에 농업에서 개인 농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습니다 . 하지만 대부분 동유럽 국가나 중국과 달리 , 고르바초프 총비서 시대의 소련은 포전담당제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 아마 당시 소련 경제에서 농업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고 볼 수 있습니다 .
- 그런데 교수님. 왜 당시 인민들은 기업소책임 관리제의 도입이 명령경제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몰랐을까요?
[ 란코프 교수 ]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 1989 년까지 대부분 소련사람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 사회주의의 개량을 자신의 기본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 뿐만 아니라 당시에 소련 사람 사고방식의 특징 중의 하나는 경제관리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었습니다 . 저는 이것은 당시 소련 국민의 집단적인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당시에 주류를 이뤘던 생각은 ' 정치를 제대로 고치면 경제가 거의 자동으로 고쳐진다' 는 것이었습니다 . 이 때문에 우리는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을 제대로 봐야 당시 소련 사회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 그렇군요. 시간 관계상 오늘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지금까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책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