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하지만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이 시간은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대담에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입니다.
<경제위기 넘지 못한 개혁의 끝, 소련의 붕괴>
- 경제문제를 간과했던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
- 경제개혁의 역효과로 경제위기 악화
- 경제에 대한 불만 , 언론에서 자유롭게 표출
- 경제위기 불거지며 가맹공화국의 독립운동 시작
지난 두 차례에 걸쳐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개혁을 통해 새로운 소련 사회를 건설하려 했지만 결국 소련은 붕괴했습니다. 개혁 과정에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정치개혁 외에 무엇이 더 필요했던 것일까요? 계속해서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 내용과 실패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 교수님. 지난 시간,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고르바초프는 원래 사회주의를 없앨 생각이 아예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985년에 대부분 소련 주민이 개량된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고 하셨는데요. 그런데 소련은 불과 6년 후인 1991년 겨울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왜 그런가요?
[란코프 교수] 고르바초프 총비서는 개혁을 시작했을 때 경제문제를 많이 간과했고,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설계도가 없이 집을 고치고 있는 목수와 같았습니다. 그가 시작한 경제개혁은 역효과를 초래했습니다. 원래 목적이었던 경제발전의 가속화 대신, 경제위기가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같은 무렵에 개혁을 시작한 중국은 고속성장을 시작했는데, 소련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란코프 교수] 우선 개혁이 매우 혼란스럽게 이뤄졌습니다. 독립채산제가 시행되자 기업소에서 노동자의 월급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듣기에는 좋은 일이지만, 이 월급에서 나오는 돈이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결국 물건 부족 현상이 매우 심해졌고, 인플레이션도 악화했습니다.
반면 중국은 공업개혁보다 농업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 1980년대의 중국은 너무 낙후된 나라여서 중국 사람의 4분의 3 이상이 시골에서 살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밥을 배불리 먹는 것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개인 농사 체제가 시작되자 열심히 일했고, 튼튼한 경제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에서 농업은 주된 관심 대상이 아니었고 , 소련경제와 총인구에서 농업과 농민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낮았습니다. 지금까지 1985년에 개혁을 시작한 소련경제가 이처럼 빨리 흔들리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많지만, 제가 볼 때 경제 정책의 실수보다 더 문제였던 것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였습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 민주화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 그런데 교수님, 소련 국민은 애초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을 지지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들은 왜 생각을 바꾸었나요?
[란코프 교수] 제일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민들의 마음이 날씨처럼 바뀐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기가 있는 정치 인물도 몇 년 만에 모두 싫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총비서도 그랬습니다. 1985년의 소련은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지만, 고르바초프 총비서가 취임한 이후 경제가 매우 빠르게 나빠졌습니다.
1940년대 말부터 소련에서는 배급제와 공급제가 거의 없었습니다. 기본 식량인 빵, 설탕, 국수나 감자와 같은 것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당연히 인민들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믿던 고르바초프와 그 지지자들은 , 언론에 대한 감시와 검열을 거의 폐지했는데, 1980년대의 경제 위기에 대한 불만이 언론과 방송에서 자유롭게 표출됐습니다. 1989년 말부터 소련 인민들은 자유가 아주 많아졌을 뿐 아니라 사상에 대한 의심도 커졌습니다.
- 하지만 교수님, 원래 소련 국민은 사회주의를 지지했다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란코프 교수] 원래 그랬습니다. 하지만 1986-87년 이후 글라스노스트, 즉 언론 자유화 정책 덕분에 언론은 이전에 일반 사람들이 짐작했지만, 확실히 알 수 없었던 사실들을 제대로 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련 언론들은 이때부터 미국이나 일본처럼 잘 사는 나라의 생활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자본주의 나라 국민들이 즐기는 정치적 자유도 전해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은 공산당의 타락과 부패 , 인민들에 대한 억압과 탄압의 실상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1980년대 초 대학에 입학했을 때, 거의 모든 소련 공산당 창시자들이 1937년 스탈린숙청 당시 스탈린에 의해 피살된 것을 알았습니다. 저처럼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대부분 지식인이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술자나 자연과학을 하는 지식인 , 평범한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그들은 1917년 혁명 이후 공산당이 감행한 대량학살을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들어와 이 사실이 다 알려졌고, 대부분 사람이 공산당의 역사가 학살과 숙청, 탄압과 만행의 역사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1990년,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에 대한 항목을 헌법에서 삭제해야 한다는 논쟁이 시작되자 모스크바를 비롯한 소련의 대도시에서 엄청난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모스크바에서 50~6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습니다.
시위에 참여한 모스크바의 노동자 , 지식인, 기술자, 하급 간부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일당제를 폐지하고, 공산당의 권력 독점을 없애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아닌 기타 가맹공화국과 일부 자치공화국에서도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운동의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 가맹공화국들에서 왜 독립운동이 시작됐나요? 언제부터 그랬을까요?
[ 란코프 교수 ] 가맹공화국의 상황은 지역별로 좀 달랐습니다 . 예를 들어 발틱 가맹공화국들은 처음부터 공산당 정권이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발틱 국가들과 같은 태도는 예외적이었습니다 . 하지만 1950 년대부터 가맹공화국에서 민족주의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 원래 생각하지도 않았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 우크라이나이든 카자흐스탄이든 그렇습니다 .
1980 년대 말 경제위기가 심각해지자 , 가맹공화국들은 문제가 생긴 이유를 러시아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권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들의 희망은 러시아 정부와 다를 바가 없는 소련 정부가 이들 지역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면 , 그들은 매우 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 흥미롭게도 소련이 붕괴한 이후 쉽게 볼 수 있던 것은 이러한 희망이 대부분 환상이었다는 겁니다 .
지금 독립국가가 된 15 개 가맹공화국 가운데 대부분은 러시아 연방만큼 잘 살지 못합니다 . 하지만 1980 년대 말 가맹공화국 사람들은 독립이 곧 경제적 기적을 가져올 줄 알았습니다 . 가맹공화국의 간부들도 독립에 대한 희망을 크게 지지했습니다 . 독립국가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은 가맹 공화국의 책임비서보다 더 좋은 일이 아닐까요 ? 결국 1991 년에 들어와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 실패가 분명해졌습니다 . 그리고 소련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
- 네. 오늘은 란코프 교수님과 함께 지난 시간에 이어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정치개혁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교수님.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