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지난 몇 주는 국제공산당과 좌파 지식인들이란 주제로 공산주의 역사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이번 주부터는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볼쉐비키 혁명으로 붕괴한 뒤
세워진 소련 공산주의 체제와 소수민족인 고려인들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죠.
구 소련은 다민족 국가였는데요, 당시에 소련당국의 공식 주장으로는 100여개 이상의 여러 민족들이 사는 나라였습니다. 그 중에 한 소수민족이 바로 고려사람으로 알려진 조선 출신 교포들인데요, 그들은 원래 연해주로 이민 갔지만, 소련이 붕괴하는 당시에는 거의 모두가 중앙아시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의 강제 이주 때문인데요,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강제이민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구소련 고려사람들의 사회, 교포사회에 대해서 조금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것이 아니지만, 조선 사람들의 해외이민 역사를 보면, 그들이 제일 먼저 이민을 간 지역은 바로 제정 러시아였습니다. 1860년대부터 연해주로 가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주로 경제 적인 이유입니다. 당시에 러시아로 간 사람들은 주로 함경도 농민들입니다.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로 간다면 땅을 값싸게 소작할 수도 있었고, 관리들의 감시는 조선에 비하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이 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과 싸우다가 해외로 나간 지식인과 유격대 대원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지식수준도 높고 영향력도 커서, 러시아 교포 사회의 대변인, 즉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1910년대 초 러시아로 이민간 유명한 의병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고려사람 대부분은 정치와 별 상관이 없고, 경제 때문에 러시아로 이민간 어렵게 사는 빈농들이었습니다.
전: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소련에 있었던 고려인들은 그 혁명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란코프: 거의 다 열심히 환영했습니다. 당시에 고려사람들만큼 공산주의 경향이 강한 소수민족을 러시아에서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유태인들도 공산주의사상을 열심히 지지했지만, 고려사람들은 유태인보다 더 열심히 공산주의를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공민전쟁 때에는 5000명 정도의 한국사람들이 공산당 군대나 공산당 유격대에 입대하였습니다. 5000명은 지금 우리들의 생각보다 아주 많은 숫자입니다. 1917년 기준으로 러시아에서 고려사람들은 약 10만명 정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남자는 절반 정도입니다. 당시에 여자들은 출산율이 높았고, 어린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높았습니다. 당시에 평균 6-7명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아사망율도 매우 높아서, 어린 시절에 많이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5만명 중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20000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많아도 3만 명입니다. 그들 가운데 5000명이 군대에 자원적으로 입대한 것은 매우 높은 비율입니다. 반대로 반공세력을 지지하는 교포들이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고려인들은 왜 열렬히 공산주의를 지지했을까요?
란코프: 제가 보니까, 이유는 적어도 3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토지 문제입니다. 교포들은 거의 모두 농민들입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소작농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 소작 조건은 이조시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착취를 많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처음부터 토지개혁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지주들의 땅을 농사짓는 소작농을 비롯한 농민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당연히 공산당을 지지했습니다.
둘째 이유는 국제주의입니다. 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나중에 국제주의를 포기하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정책을 많이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혁명 때 아직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산당의 약속은 공산주의 국가가 된 러시아에서 소수민족에 대한 아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려사람들은 제정러시아에서 어느 정도 차별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차별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전: 그렇다면 공산당의 약속은 소련에서 민족차별을 완전히 없앤다는 것이었나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지만, 당시에 공산당은 간부들도 국제주의 원칙을 열심히 믿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식민지 체제를 부숴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포들의 지지를 받은 세 번째 이유입니다. 당시에 조선은 일본 식민지였습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식민지 체제를 부숴버릴 약속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제와 많이 싸웠습니다. 1917년 혁명 이후 일본세력은 연해주에서 반공세력, 즉 백군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고려사람들은 당연히 일본에 반대하는 공산주의 세력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토지개혁, 국제주의 원칙 그리고 반일 입장 때문에 조선 이민들은 당시에 열심히 공산주의 세력을 지지하였습니다.
전: 소련 공산주의 초기 사회에서 조선인들의 위상은 어떠했습니까?
란코프: 소련 당국자들은 처음에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1930년대 초까지 구 소련에서 소수민족 출신들은 이런저런 특권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교육 부문이 그렇습니다. 고려사람 출신인 젊은 러시아 간부들은 슬라브계 러시아인들보다 공산당 입당도 쉽게 했으며, 공산당 간부가 되기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국가 예산으로 많은 한국어 학교가 생겼습니다. 당시에 고려사람들의 마을마다 무조건 한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920년대 말 2-3년제 사범대학, 당시에 소련말로 '고려사람들의 테크니큠'이 우수리스크에서 생겼습니다. 1930년대 초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고, 완벽한 사범대학이 되었습니다. 1930년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말인 조선말로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는 당시에 경성으로 불린 서울도 아니고, 평양도 아니고 소련 땅인 블라디보스토크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중엽 들어와 고려사람들의 상황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전: 어째서 입니까?
란코프: 근본적인 이유는 소련지도자들은 국제주의 원칙에 대해 실망을 많이 느꼈고, 세계혁명을 이루는 것보다 소련이라는 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드는 것을 자신의 기본 목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수민족에 대해서 의심과 적대감이 많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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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