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공산주의 체제와 고려인들: 사할린 한인사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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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교수님, 지난번에 1937년 강제이동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살게 된 재소 교포, 즉 고려사람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은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했는데요. 제2차 대전 이후, 그러니까 조선반도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이후에 상황은 바뀌었습니까?

란코프 교수: 중앙아시아에서 사는 사람들은 전쟁 이후에도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어느 정도 그들에 대한 차별과 의혹의 눈길이 더욱 심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람들의 역사에서는 1945년 광복 이후에 두 가지 중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북조선 국가의 탄생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방 사할린에서 또 하나의 한국인 사회가 생긴 것입니다.

전: 북조선 국가의 탄생이 고려사람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었습니까?

란코프: 상관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북조선 선전일꾼들이나 역사학자로 위장한 선전일꾼들은 북조선 국가가 김일성을 비롯한 유격대 출신들이 창립한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거짓말입니다. 당시에 김일성과 유격대 사람들은 원동 소련군대 병사들이었을 뿐입니다. 그 사람들은 1945년 조선해방과 아무 관계가 없었고, 연해주 기지에서 조용히 주둔해 있었습니다. 1945년 8월에 보름 정도 조선반도에서 일본군대와 싸웠던 군인들은 모두 다 소련사람들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고려사람들은 차별을 받아서 군대로 못 갔습니다. 그래도 예외가 있었습니다. 특히 조선반도에 진출한 소련 부대에서 정찰국, 심리전국 등에는 조선말을 잘 하는 고려사람 군관들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1945년 말부터 조선반도 북부에서 공산주의국가를 건설, 설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소련당국은 사회주의 건설을 지도하기 위해서 고려사람들을 많이 조선땅으로 보냈습니다.

전: 얼마 전에 '허가이'라는 고려사람 이야기를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던 사람인데, 그러면 그가 거기서 조선땅으로 파견됐다는 건가요?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그는 1945년 말에 북조선에 도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1956년 8월에 김일성에게 도전한 박창옥도 원래 소련군대 정찰기관 출신자로서, 40년대 초부터 만주와 조선반도에서 무장작전에 많이 참가했고, 간부가 되었습니다. 지금 북조선에서 잘 알려진 노래 휘파람의 가사를 지은 시인, 조기천도 당시에 소련당국자들에 의해 파견된 고려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나중에 1950년대 말에 김일성과 그의 측근인 만주 빨치산 출신자들은 소련 출신 간부들을 거의 모두 숙청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1940년대 말 고려사람 출신들이야말로 바로 북조선 국가를 건설한 핵심 정치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남방 사할린에 한인 사회가 생겼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네. 1905년부터 1945년까지 40년동안 사할린 남방은 일본영토였습니다. 1930년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사할린으로 갔습니다. 자원적으로 간 사람들도 있었고 강제적으로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1945년 이후 사할린 남방 지역은 소련영토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거기에 살았던 일본인 30만명은 모두 다 강제출국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3만명 정도의 조선사람들은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에서 또 하나의 조선사람 사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사할린의 조선사람들은 처음부터 중앙아시아 고려사람들을 싫어했습니다.

전: 따지고 보면 같은 한민족 출신인데 왜 싫어했을까요?

란코프: 흥미로운 질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고려사람들에 대해 민족 연대성을 별로 느끼지 않았습니다. 사할린 사람들은 남조선 출신자들입니다. 고려사람들은 압도적으로 19세기에 러시아로 이민 간 함경도 출신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입니다. 당시에 사할린 사람들 대부분은 가능한 한 빨리 남조선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소련 당국자들이 출국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사할린에 사는 조선사람들은 처음부터 소련당국과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적대감이 많았습니다. 제가 벌써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고려사람들은 처음부터 공산당 정권도, 공산주의도 열심히 지지하였습니다. 1937년 강제이동 이후에 지지가 많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결국 사할린의 조선사람들에게 고려사람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이 싫어하는 빨갱이들입니다. 게다가 고려사람들은 조선 출신들인데도 스스로 원해서 소련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할린사람들은 자신을 고려사람이라고 절대 부르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한국사람이나 한인들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말까지 사할린 한인 대부분은 소련국적도 거부했습니다. 무국적자로 그냥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련 국적을 가지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전: 고려사람들과 남방사할린 조선사람들은 접촉이 있었나요?

란코프: 1940년대 말부터 소련당국자들은 사할린 한인사회를 공산화시키기 위해서, 고려사람 출신 간부들, 지식인들 그리고 선전일꾼과 보위원까지 사할린에 파견했습니다. 당연히 사할린한인들은 그 고려사람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사할린 사람들이 보기에 고려사람들은 공산당 졸개들입니다. 이와 같은 적대감은 1970년대까지 아주 심했는데, 70년대 말 들어와 적대감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래도 대체로 말하면 원래 사할린 한인들과 고려사람들은 호상 적대감이 매우 심했습니다.

전: 그렇다면 두 조선사람들 간에 주먹다짐이나 몸싸움 같은 것도 있었나요?

란코프: 학교에서 어린이들은 주먹싸움까지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할린에 거주한 고려사람들은 간부 층입니다. 소련은 북한보다 자유가 많은 나라지만, 간부들에 대한 공격은 아주 위험한 행동입니다.

전: 그런데 교수님, 사할린 조선 사람들의 규모는 고려사람들보다는 훨씬 작았던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할린 조선 사람들은 1945년에 3만 명 정도였던데 비해서 고려사람들은 1930년대에 이미 17만 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두 조선 출신 사회의 인구도 시대가 흐르면서 많이 변했을 것 같은데요.

란코프: 사할린 한국인 사회에서는 별로 인구변화가 없었습니다. 지금 2010년대에도 여전히 3만명 선입니다. 하지만 고려사람들은 1940년대 말 22만 명 가량이었던 것이 소련붕괴 당시에는 45만 명 정도로 두 배 늘어났습니다. 소련 내 다른 민족과의 결혼이 많아서, 고려사람의 혈통을 갖고 있는 인구 수는 80년대 말 기준으로 70만-80만명 정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고려사람들은 대부분 러시아사람들과 결혼했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