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얼마 후인 4월 15일에 한국에서는 총선거가 열립니다. 서로 대립하는 여당과 야당은 각기 서로 다른 정책과 전략을 제안하고,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선거가 바로 자본주의국가의 특징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공산주의국가에서도 선거가 있지 않았습니까? 공산진영의 선거는 자유선거와 많이 달랐나요?
란코프 교수: 사뭇 달랐습니다. 하지만 제일 먼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맑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초기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조만간 생길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유선거가 확실히 있을 줄 알았습니다. 상식과 달리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까지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보다 더 참된 민주주의를 세우겠다는 약속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부르주아계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야당이든 여당이든 누구든지 돈이 없으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점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직후에, 누구든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로 선언했습니다.
기자: 그런데 교수님, 공산주의 혁명 이후에 결국 일당 독재 체제가 생기지 않았었나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물론 혁명 직후에 곧바로 일당 독재가 된 것은 아니지만,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일당 독재 체제가 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에 소련공산당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요? 프롤리타리아(Proletariat) 계급, 즉 로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정당은 당연히 공산당입니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당연히 공산당 일당독재가 성립하는 것이고, 이것은 일당 독재 체제의 시작입니다.
기자: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에서는, 몇 개의 서로 다른 정당이 대립하고 경쟁하는 선거 대신에, 공산당원 후보자 1명이 출마하는 선거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란코프 교수: 네 그렇습니다. 1920년대 소련사회는 아직 공산당이 완전히 지배하는 정치생활에 익숙하지 못했는데요. 그래서 지방 선거에서는 가끔 후보자가 몇 명 등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37년까지 소련에서 실시되었던 선거제도를 보면, 옛날 착취계급, 즉 부르주아(Bourgeoisie)계급이나 지주계급 출신자들은 투표권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보다 별 의미가 없는 상징적 조치 뿐입니다. 노동계급 출신이라고 해도 후보 선택의 자유가 없기 때문에, 투표는 정치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1920-30년대 소련의 선거는 공개투표로 진행됐나요? 아니면 비밀투표였나요?
란코프 교수: 원래 공개투표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겁을 먹고 체제에 반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향후의 소련 역사를 감안하면, 일반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합리주의적 태도였습니다. 1920년대 말에 숙청이나 단속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1920년대 말 공산당이 추천한 시 위원회 후보자를 많이 반대했던 사람은, 1930년대 말의 숙청시대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1936년에 소련이 헌법을 개정한 다음에, 소련 붕괴 때까지 거의 변함 없이 계속된 선거제도가 등장했습니다.
기자: 헌법개정에 따른 새로운 선거제도는 어떤 제도일까요?
란코프 교수: 겉으로 보면 민주주의적인 체제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출신성분과 무관하게 누구든지 투표권이 있었고, 비밀투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매우 흥미로운 체제가 생겼는데요. 공산당은 선거 때 공산당과 비당원들이 선거 연맹을 맺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다른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단체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공산당원이든, 비당원이든 모든 사람들이 선거 연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거구마다 후보는 하나밖에 있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냥 투표장에 가서 한 명의 후보자에게 투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처럼 투표장에 가서 후보 이름이 이미 적혀있는 선거 용지를 투표함에 그대로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소련이 무너졌을 때까지 관영언론은 투표율이 98-99%라고 발표했고, 후보자에 대한 지지율도 98% 정도라고 보도했습니다.
기자: 교수님, 소련 관영언론의 주장은 사실입니까?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대체로 사실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98%가 아니라 90-95% 정도라고 생각되는데요. 소련시대 사람들은 투표하도록 많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물론 소련은 북한과 달리 조직생활을 거의 안 했는데요. 그래도 투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조금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 필요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투표소로 이용되는 공간은 보통 학교 체육관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일반 가게에서 찾기 어려운 물건도 팔았으며, 싼 가격으로 맛있는 경식을 먹을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투표장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조금 있었는데요. 특히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자유가 많아졌을 때부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극소수였다고 생각됩니다.
기자: 하지만 소련의 유권자들은 이렇게 형식적으로 선출된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란코프 교수: 한편으로 보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진영 국가에서 국회와 같은 기관은 사실상 실권이 없었습니다. 의원들은 무슨 로봇처럼 명령을 받자마자 다 같이 찬성투표를 했고, 만세를 외쳤고,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사실상 소련 최고 소비에트이든 중국 전국인민대표자회의이든 아무 토론이 없다는 것은 원래도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의원들은 인민들을 도와 줄 수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도가 고장났을 때, 더 빨리 고치도록 할 수도 있었고, 어떤 늙은 노병이 제대로 공급을 받지 못했을 때, 그를 도와줄 수도 있었습니다. 소련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민중들은 의원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어느정도 존경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기자: 지금까지 소련 선거제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공산국가들에서 어땠을까요?
란코프 교수: 길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은 소련의 선거제도를 그대로 복사했기 때문입니다. 뽈스까(폴란드)이든 웽그리아(헝가리)이든 간에 비슷했는데요. 유일한 차이점은 이들 국가에서 공산당이 아닌 정당이 허용됐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당은 사실상 괴뢰정당, 즉 위성정당입니다. 1937년 이후 소련처럼, 이들 정당은 공산당과 선거연맹을 했다고 주장했고, 자신들의 후보를 출마시킬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사회주의 진영이라면 어디에서나 대안 후보자가 없는 선거제도가 있었고, 어디에서나 찬성률은 98% 정도로 주장되었습니다. 물론 어디든지 나라의 정치를 결정하는 기관은 국회가 아니라 당중앙, 그리고 시당과 군당 등입니다.
기자: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