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송년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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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 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정말 분위기는 좋았어요... 북한에서처럼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술 먹고 즐기는 게 아니고 그냥 북한으로 말하면 아이들 빼배놀음 같아요.

소연 씨 직장에서 얼마 전 송년회를 했답니다. 남한에 와서 첫 직장, 첫 송년회인데 어째 소연 씨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멋지고 고급스러웠지만 술에 취해서 속 타는 얘기(속에 있는 얘기)까지 다 털어놓고 한바탕 싸우기도 하는 북쪽 송년회가 못내 그립다고요.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 첫 송년회 얘깁니다.

진행자 : 소연 씨, 북한과는 좀 달라도 올해 직장에서 했던 송년회도 분위기도 좋고, 나름 의미 있지 않았어요?

박소연 : 으리으리한 곳에 왔으니... 근데 속으로는 그런 생각했어요. 망년회에서는 정말 가식적인 생활 총화가 아니고 진짜 속에 있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렇게는 안 나올 것 같아요. 여자들은 주로 앉으면 남편이나 시 엄마 흉을 보고요...(웃음) 직장 동료나 지배인 흉도 보고요. 한 해 담았던 얘기를 해 지나기 전에 꺼내놓는 거죠. 지금도 제가 기억나는 건 90년대 망년회 할 때는 반찬이 남으면 그걸 그대로 집 주인네 주고 왔습니다. 근데 2천년에 결혼해서 여맹에서 망년회를 하는데 여맹 망년회는 사업소와 다른 게 1만원씩 모으는 걸 쌀 3백 그람에 옥수수 국수 한 사리 값만 내자 그러죠.

그렇게 모으는 데도 그거면 우리 집 식구들 한 끼 먹을 돈인데... 이러고 안 오기도 하고 먹고 죽으면 때깔도 좋다더라... 그러면서 오기도 하죠. 근데 그 때는 남은 반찬, 하나하나 다 나눠 싸갖고 왔습니다. 여맹은 다 가정주부들이니까 알뜰하다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생활이 힘들어졌다는 얘기죠. 남자들은 이런 거 몰랐죠?

문성휘 : 우리는 몰랐어요.

박소연 : 남자들은 술만 있으면 만사 좋은 거죠... (웃음) 근데 저는 이게 제일 궁금한데요. 남한 직장들에서는 망년회 비용을 누가 댑니까?

진행자 : 남쪽 직장에서는 망년회 비용이 어느 정도 책정돼 있어요. 직장에서 낼 겁니다. 근데 우리 같은 외국 회사들은 갹출입니다. 각 자 주머니에서...(웃음)

박소연 : 네?? 북한이네... (웃음)

문성휘 : 참... 섭섭한 곳이에요...

진행자 : 운영비를 먹고 마시는데 쓰지 말라는 얘기죠. 거기다가 술값은 어떤 일이 있어도 엄격하게 안 됩니다. (웃음)

문성휘 : 그런데 남한에 송년회가 제일 나쁜 점! 북한 송년회는 마음에 쌓인 피로, 스트레스를 확 풀어버리는데 남한 송년회는 그게 없어요. 그저 일상처럼 지나가요. 북한처럼 한번 모여앉아 싸우기도 하고 밥상 두드리며 노래도 부르고 또 안방에서 젊은 것들은 시시덕거리며 노래도 부르고... 이래야 스트레스 날아가죠.

진행자 : 스트레스를 날리는 방법이 그거밖에 없나요? 죽자고 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야만 속에 있는 얘기가 나오는 건 아니잖아요? 술 안마시고 맨 정신에 하는 게 더 논리적으로 감정적이지 않게 얘기할 수 있잖습니까. 술 마시고 얘기하고 싸우고는 그게 다 기억나지도 않습니다.

문성휘 : 그래도 뭔가 풀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남한 사람들 굉장히 교활하지 않습니까? (웃음) 싸우지도 않고, 북한말로 하면 야지먹인다...

박소연 : 여우같이 군다... 이런 뜻이에요.

문성휘 : 절대로 화도 안 내고 나쁜 소리도 안 하면서 상대방의 가슴을 콕콕 찌르게 공격하는 거죠. (웃음) 남한 사람들은 좀 그래요. 그게 어떻게 스트레스가 풀립니까.

진행자 : 근데 남쪽에선 맨 정신에 못 하다가다 술의 힘에 의존해서 얘기하는 걸 비겁한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박소연 : 우리는 반대입니다.

문성휘 : 그래요. 술을 먹어야 제 진심이 나온다고 합니다.

진행자 : 정말 얘기 해보면 북쪽은 놀라울 정도로 술에 대해 관대해요. 술 먹는 문화라든가 술 먹고 치는 사고에 대해서...

문성휘 : 아닙니다. 이번에 장성택 처형도 경제 관련된 부분이 있다고 하는데요. 북한은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남한보다 훨씬 관대합니다. 오직 정치! 정치 문제에 대해선 칼날이고요. 남의 뒷말하는 것도 사실 안 좋은 일이잖습니까? 그러니까 북한 사람들 상소리라도 많이 하죠? 야한 얘기... 그것밖에 안 남는 겁니다.

진행자 : 듣다보니 북한에선 망년회 자리가 숨 쉴 구멍? 그렇게 느껴지네요.

문성휘 : 그렇죠. 그리고 그 자리는 초급당비서도 있으니까 애초 정치적인 얘기가 나오면 툭툭 치면서 막아줍니다.

진행자 : 남쪽은 어떤 송년회든, 사실 송년회 아니고 어떤 술자리라고 해도 시작은 안부를 묻다가 끝내는 정치 얘기로 싸우면서 끝이 나기가 다반사죠. (웃음)

문성휘 : 맞아요. 북한처럼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니까 의견 일치를 못 보고 끝나죠. 북한 같았으면 주먹치기를 하더라도 의견 일치? 아니지... 북한은 정치 얘기를 일절 못하죠. (웃음) 저는 근데 남한의 이런 문화는 참 재밌어요.

진행자 : 솔직히 말하자면 남쪽 사람들도 송년회 하면 술이 빠지지 않고 많이 마시죠. 그러나 사회적 분위기가 좀 자제하는 쪽으로 가는 건 술 때문에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문성휘 : 근데 그건 남한만이 아니고 대개 경제나 문화가 발전한 나라 사람들일수록 술 더 적게 먹는 것 같아요. 저희들도 지금까지 송년회에 불만이 많다는 거 아직까지 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죠? 참 힘들어요. 그 문화에서 벗어난다는 게...

진행자 : 직장에선 남한 사람들과 생활해서 힘들지만 집에서 하시면 그 분위기 나오시잖아요? 집에서 북쪽에서 온 분들끼리 그렇게 하시면 되죠.

문성휘 : 에이, 집에서 모여도 북한식은 다 사라졌습니다. (웃음) 속 타는 소리도 못해요. 싸우면 즉시 경찰이 달려 올 것이고...

박소연 : 그리고 층간 소음이 있잖아요? 젓가락도 못 두들기고 발도 못 구를 거고...(웃음) 남한 사람들, 너무 딱딱해요.

진행자 : 주택에 사시면 그런 문제가 없을 텐데 대부분 탈북자들은 아파트 사니까 그 문제가 또 있네요. 그러니까 이웃의 정도 잘 모른다고 하시고 재미없다고 얘기하시죠.

문성휘 : 근데 이상하게 북한도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더 정이 없어요. 옆이라고 해도 잘 모르고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 같고요. 그리고 북한은 몇 십 명이 있는 직장이면 모든 직장 사람들의 집을 다 돌아봐요. 이번 명절 때는 누구네 집 가자... 여기는 일차, 이차, 삼차 이렇게 식당을 옮겨 다니지만 북한은 일차 아무개집, 이차 아무개집... (웃음) 다 주변 가까이 사니까요. 그러니 어떻게들 사는지 사정을 뻔히 잘 아는데 여긴 상대가 어떻게 사는지, 같은 직장 사람이라도 집에 못 가보죠. 섭섭해요.

박소연 : 그러니까 사람이 가까워지지 못해요.

진행자 : 인정할 건 인정하겠습니다. 남쪽은 북쪽에 비하면 그런 정은 이제 많이 사라졌어요. (웃음)

문성휘 : 이게 북한 사회 구조가 좋아서가 절대 아니에요.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어쩔 수 없어요. 나도 시간 나면 텔레비전 보거나 컴퓨터에서 뭘 들여다보거나 나가도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한다고 하죠. 옆집하고 관계되는 일이 거의 없어요. 옛날 한국 이웃들도 북한과 비슷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진행자 :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잃어가는 게 또 있는 거죠.

문성휘 : 그러니까 북한은 송년회를 해도 좀 인간의 정이 많고 서로 상대의 사정을 잘 알고 무슨 얘기하면 왜 그런지 느낌이 오고요. 근데 한국에서 살아보니까 속 타는 소리를... 이 기자, 사무실에선 제가 속 타는 소리를 많이 하죠? (웃음) 한국에선 송년회 자리뿐 아니라 상대가 어떻게 사는지... 그런 부분에 대한 관심이 덜 해요. 관심이 있다고 해서 그건 한국식 관심이지 북한식 관심은 아니고요. 그러니까 그게 서운하고 뜨겁고 좀 더 격렬한 북한 송년회 자리가 그립다는 얘기죠.

진행자 : 남쪽에서 보자면 너무 뜨겁고 격렬한 거죠. 직장 동료는 직장 동료로 지켜줘야 할 선이 있잖아요? 그걸 넘으면 침해죠.

문성휘 : 한국에서 제일 무서운 게 말 한 번 잘 못 했다가 그 뭐든가? 아, 야한 말 잘 못하면 성추행이라고 경찰에 끌려갑니다. (웃음)

진행자 : 에이... 끌려가는 건 아니고 욕 한 마디 듣겠죠.

박소연 : 남한 기준으로 하면 북한 남자는 다 성추행범일 겁니다. (웃음)

진행자 : 그런 부분에서 저희가 차이가 있고요. 그런 차이를 저희가 함께 살면서 좀 좁혀 가야하겠고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 집에 한번 오실까요? (웃음)

박소연 : 그래요. 꼭 갑시다!

진행자 : 제가 시작하면서 송년회, 한 해 보낸다는 뜻이고 망년회, 한 해를 잊는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올해 송년회이십니까? 망년회 십니까?

박소연 : 망년회요. 한해를 잊고 싶어요.

진행자 : 한 해 잊고 싶었던 일이 많았다는 얘기는 별로 좋은 해는 아니었다는 얘기잖아요?

문성휘 : 그만큼 소연 씨가 지금 고충을 많이 겪는다는 얘기 같네요. 그래도 한해 한해가 막 차이가 납니다...

박소연 : 올해는 일들이 참 많았어요. 아이를 중국에서 데려오면서도 굉장히 무서웠고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만 어느 쪽 하나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네요. 그냥 다 잊고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요.

문성휘 : 그냥 다 잊으세요.

진행자 : 잊고 싶은 해든, 그냥 보내기 아까운 해든... 어쨌든 일 년 다 갔습니다.

문성휘 : 정말, 새로운 각오를 좀 다져야겠는데 내년엔 어떤 각오를 다져야겠는지 모르겠어요.

박소연 : 아, 저 그거 정말 우리 아들에게 한 가지 배웠는데요. 제가 며칠 전에 내년에 돈을 좀 모아서 전세로 좀 돌리고... 이렇게 계산을 하고 있으니까 소파에 앉아서 저를 보면서 아들이 그래요. '엄마, 그냥 살어...' 세상을 그냥 살래요. 진짜, 니 말이 일리가 있다. 그냥 순리에 따라 그냥 살래요. 그래서 제가 적어 놓았습니다. 우리 아들의 명언, 세상 그냥 살자.

문성휘 : 그래요. 그냥 사는 게 맞아요...

소연 씨가 지난해 참 많은 계획들을 세웠습니다. 아들을 데려오겠다, 북쪽에 가족들과 꼭 연계를 해서 돈도 보내주고 싶다, 아이를 키워야하니 꼭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잡겠다, 제가 아는 건 여기까지고 개인적으로 세운 계획은 더 많았겠죠? 남쪽식으로 표현 하자면 정말 아등바등 살았습니다. 문 기자 표현에 의하면 정착 2년차의 삶이랍니다. 그러나 어디, 마음만 급하다고 모든 일이 내 마음처럼 되던가요?

소연 씨 아들 말대로 3년차는 좀 더 느긋해지는 게 정답일지 모릅니다. 흐르는 대로, 너무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진짜 그냥 살자... 새해를 맞으면서 소연 씨에게도 우리에게도 수많은 새로운 목표보다 마음을 비우는 일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요.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여기까집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고요.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