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수재였던 북한 유학생이 탄광으로 쫓겨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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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은 탈북민 신용건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신용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용건: 네. 안녕하십니까.

이승재: 지난주엔 해외로 파견된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에 대해서 얘기를 해봤는데요. 오늘은 북한 유학생들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먼저, 한국에선 개별적으로 원하면 자유롭게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습니다. 제 주변에는 적게는 1년, 길게는 10년도 넘게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이 있는데요. 대체로 꼭 자기가 공부하던 나라의 성향을 닮아가지고 돌아오더라고요. 미국 유학생들은 좀 더 자유분방한 것 같고 러시아 유학생들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듯 벽이 좀 있지만, 예술과 깊이에 능통한 것 같아요. 북한의 해외파견 엘리트의 자녀들도 그런 영향을 받을까요?

신용건: 학창시절 저희 반에 아버지가 러시아 참사로 파견되어 5~6년 해외 생활을 한 학생이 전학왔습니다. 저는 그때 생활면에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느낄 때였는데요. 그래도 그 친구는 높은 수준처럼 보였어요. 행동이 준수하고 도덕이 있었습니다. 모든 생활과 활동이 깔끔했어요. 아직 북한 주민들은 국제문화 인지도가 낮습니다. 그만큼 문화적으로 차단되고 봉쇄되어 있으니까요.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다르고 중국이 어떻다는 것은 느끼지 못해요. 단지 해외물을 먹고 오면 우선 자기 몸가짐부터 달라요. 자기를 어떤 특수한 계층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니 동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가정에 마련된 다른 세계에 푹 빠져있습니다.

이승재: 가정에 마련된 다른 세계라, 무슨 의미죠? 두문불출한다는 뜻인가요?

신용건: 해외생활을 다년간 했다면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원이 달라요. 러시아에 갔던 사람이라면 유럽풍, 서양풍이라 할 정도로 가구부터 시작해서 러시아 제품이 들어와 있습니다. 거기서 살던 문화 그대로 이 작은 집 울타리 안에서 재연하고 있는 겁니다. 러시아식으로 ‘위신스키’라는 말을 많이 하거든요. 틀을 차리고 사람들과 간격을 두고요. 그런데 한편으로 보면 부모들의 이런 속박 속에서 자녀들은 외로운 감을 많이 느낍니다. 동무를 성큼 집에 데려 가지도 못하고 밖에서 잘 휩쓸려 놀지도 못하고 학교생활에 재미를 잘 붙이지 못하더라고요. 그리고 부모들이 “절대로 해외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지 말아라”,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라”, “그들과 우린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집엔 사람을 끌어들이면 안된다”고 말하죠. 사회주의 시스템에선 잘 산다는 것이 큰 시한탄이거든요. 그러기에 아이들 자체가 그런 교양을 너무 많이 받아서, 아무리 물어봐도 러시아에서 생활할 때 어땠는지 얘기를 안 합니다.

이승재: 이런 데서도 어쩔 수 없는 북한 사회의 속성이 보이네요. 반면에 한국에는 해외에 유학생이 수십만 명 있습니다. 굳이 서구로만 가는 것도 아니에요. 요즘은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아랍이나 남미도 많이 갑니다. 원하는 공부를 위해서, 해외 문화를 섭렵하기 위해서,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 등 다 제 각각의 이유가 있고요. 가서 너무 마음에 들면 현지에 취직해서 사는 경우도 많아요. 현지인과 결혼을 하기도 하고요.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어떤 삶으로 살든 이들의 삶은 결국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기술의 발달이나 새로운 문화를 유입시키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는 양측 나라 외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죠. 북한은 아무래도 국가를 위해 학생들을 해외에 유학을 보내겠죠?

신용건: 네. 북한에서의 유학은 철두철미하고요. 자의가 아닙니다. 국가적인 조치입니다. 국가 계획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인재양성을 위해서 파견하는 겁니다. 이들은 유학생으로 파견될 때부터 큰 국가적 책임을 어깨에 지고 나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기술 이전의 목적에 따라 자연과학 분야 유학생들이 선차적으로 선발되고, 다음엔 예술 분야입니다. 김정은 집권시기에 들어와서 2010년대 초반에 평양엘리트대학들에서 100여 명 인재를 선발해서, 세계 각국에 건축공학을 전공하기 위한 유학단을 조직했습니다. 김정은의 지시였습니다. 그들이 선진적인 건축학을 습득하고 돌아와서 백두산설계연구소를 비롯한 중요 건축 담당소에 파견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창전거리나 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과학기술 전방을 비롯해 김정은 시대의 새로운 건축양상을 창조하게 된 겁니다. 이는 김정일시대의 건축과는 다르거든요. 그와 함께 평양과 원산, 강계를 비롯해서 도시 조명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 역시 그들에 의해서, 현대적 미감이 나도록 실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승재: 외부에서 봐도 북한의 건축양식이 최근에 세련되어졌다고 느꼈는데 바로 이 해외 유학생들 덕분이었군요. 어찌되었던 국가 발전을 위해서 이렇게 훌륭한 인재들을 체계적으로 키워왔다면 북한 사회가 분명 더 발전할 수 있었을 텐데요. 사실 외부에서는 북한의 발전이 더디다, 아니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잖아요?

신용건: 얼마전 북한의 경제대표단이 여러가지 목적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어요. 그 과정 중에 러시아의 이름있는 공과대학을 참관했다고 합니다. 대학의 전시관에서 경제의 현대화와 자동화에 따르는 경제관리체계와 매 공장기업소의 통합관리시스템을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본질에 맞게 새롭게 정리한 도면을 보게 됐답니다. 그걸 보고 북한대표단이 무척 기뻐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관련 논문을 좀 보여줄 수 없느냐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논문이 1980년대 말에 쓰여진 논문인데 당시 대학에서 수재로 인정받던 학생의 졸업논문이었다고 합니다. 북한대표단이 그 논문의 사본을 줄 수 없느냐고 애원했다는데요. 가관인 것이 대학측에서 너무 놀라서 대답을 못했다는 거예요. 왜 놀랐는가? 그 논문은 북한 유학생의 졸업논문이었기 때문이랍니다. 그 유학생이 정말 수재였고 1980년대 말 당시엔 러시아 경제계, 학계에서 파문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러시아 대학에서 자기 학교에 남아 달라고 많이 회유했지만 그 학생은 큰 포부와 꿈을 안고 조국으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북한의 경제대표단이 자기 학생이 쓴 졸업논문을 모른다? 더군다나 자기 나라 유학생이 쓴 논문을 다른 나라에 와서 구걸한다는 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겠습니까? 대표단이 돌아와서 즉시 그에 대해 본국에 보고했고 전국적으로 찾아본 결과, 국제적인 수재가 이젠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어느 지방에 탄광 막장 안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어요. 과거 그 논문이 같은 사회주의임에도 불구하고 구 소련에선 높게 평가되었지만, 북한에선 김일성이 내놓은 대안의 사업 체계를 부정하고 훼손시켰다고 역평가되어 졸지에 사상변질 유학파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혁명화도 아니고 아예 매장되어 막장 안에서 추방자라는 곱지 못한 눈길 속에 속절없이 썩고 말았어요. 결국 유학생들이 유입해 들여오는 기술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용만 될 뿐이고 개인의 운명에선 오히려 불리한 형국으로 많이 조성됩니다.

이승재: 네.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의 발전보다는 나의 발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 유학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인 노력과 성취가 결국은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우리는 세계역사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젊은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키워내지 못한다면 개인도, 사회도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긴 어렵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