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님을 위해 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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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신용건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신용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신용건: 네. 안녕하십니까.

이승재: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비루스가 번지면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요. 그 간절함이 큰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올림픽 출전을 앞두고 있던 국가대표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해 도쿄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올림픽이 계속 연기되고 있고 올해도 어떻게 될 지 지금 아무도 모르는 상태거든요. 그럼에도 한국에선 여전히 선수들이 올림픽 출전에 대비해 열심히 훈련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출전 여부는 아직 오리무중이지만 선수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만일을 대비해 훈련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신용건: 네. 마찬가지일 겁니다. 언제 개최될 지 모르는 올림픽인데 그에 대한 대응훈련은 계속 하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체육도 경제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습니까? 먹을 것도 없는 사회인지라, 북한에서 국제경기를 목적으로 하는 운동들은 메달을 딸 것 같은 승산종목만 남겨놓고 다 없애라고 지시합니다. 최근에는 역기, 유술, 레슬링, 사격, 태권도, 여자축구 등인데요. 북한의 모든 체육단들에선 승산종목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종목에서 좋은 결과를 따는 것이 오로지 목표겠죠.

이승재: 아, 그래서인지 국제무대에서 북한 선수들의 메달을 보면 방금 말씀하신 종목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던 것 같네요. 북한 선수들이 올림픽에 참가하면 해외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거든요. 하지만 북한 선수들에겐 접근이 허용되지 않거나 인터뷰 요청도 거의 거절 당하는데요. 정작 메달을 따면 말을 너무 잘하더라고요. 하지만 선수들 소감이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같아서 다시 한번 해외언론이 깜짝 놀랍니다. 전부 장군님께 감사한다고 하니까요.

신용건: 네. 선수들에겐 경기 성과도 중요하지만 말을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같은 성과라도 경기 후에 어떤 말을 하는가에 따라서 차후 대접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북한 선수들은 경기 전에 벌써 승리를 대비해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라톤의 정성옥 선수만 보더라도 세계 마라톤 경기에서 1등으로 들어서자마자 들이대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는 장군님을 그리며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그 짧은 말 때문에 정성옥 선수 운명은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어요. 인민체육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한마라손협회나 국가체육위원회 요직 책임일꾼으로까지 성장했습니다. 일개 체육인이 정치계 인사로 둔갑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많습니다. 이렇게 영수를 찬양하는 말들이 진심이라기 보다 실상은 자기를 위해 꼭 그래야만 하는 가식이라는 것을 그들 자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승재: 운동보다 말을 잘해야 한다, 그래야 영향력을 가진 엘리트, 북한 식으로 말하면 힘과 권력을 가진 간부가 될 수 있다고 들리는데요. 한국에서도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세계선수권에서 메달을 따고 이후에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체육인들이 많습니다. 북한과 다른 점이라면 그들이 메달을 따기 까지 자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잘 알기 때문에, 선수 은퇴 후에도 존경을 받고 있다는 거죠. 북한에선 어떤 과정을 거쳐 엘리트 체육인이 되고 그러다 국가영웅까지 될 수 있는 건가요?

신용건: 매우 어려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각급 체육학교에서 조기체육을 거쳐 도나 시 체육단에 선발되어야 하고, 국내 경기들을 통해서 실력이 인정될 때 중앙급 체육단에 선발됩니다. 큰 체육단 생활도 모든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개인 부담이 엄청 많습니다. 훈련 자체가 최악의 생활에서 진행됩니다. 필요한 영양섭취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악조건에서의 훈련은 그야말로 악을 먹고 진행하기 마련입니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를 준비하면서 국가대표팀이 선발되는데 이때부턴 검은 돈이 많이 작용해요. 해주시가 고향인 정성옥 선수는 원래 팀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그의 능력은 주력 선수보다 더 우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국가대표팀은 정 선수가 아닌 김 아무개라는 선수를 주력 선수로 내세웠습니다. 그것이 감독이나 더 윗 단계에서 돈 교섭이 이뤄진 결과입니다. 왜 정성옥이라고 승부욕이나 야심이 없겠어요. 나중엔 보조역할만을 해야하는 원래 전술과 달리 본인이 직접 달리기로 냅다 밀고 나갔어요. 만일 그가 우승하지 못했다면 받을 질타는 어마어마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그리며 뛴 것은 장군님이겠지만 어떤 의미의 장군님인지는 아마 그만이 알고 있겠죠.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놓은 북한의 열혈남아들은 이렇듯 한결같이 개천에서 용나는 기적을 향한 인생의 투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승재: 그러니까 정성옥 선수는 금메달을 따내지 못했다면 북한에 돌아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단 얘기네요. 그런 도전까지 감내해야 하는 북한 체육인들 그 부담이 정말 크겠네요. 사실 한국에서도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해 전문적으로 훈련을 시켜서 엘리트 체육인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과 비슷하게 메달 가능성이 있는 종목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있어 소외된 분야의 체육인들은 사비를 털어가며 운동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피겨스케이트의 김연아 선수죠. 국가적 지원도 국내 후원이나 투자도, 더구나 국민적 관심도 없던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기까지 정말 혼자 실력을 갈고 닦았고요. 온전히 어머니 혼자서 뒷바라지를 다했거든요.

신용건: 북한의 모든 선수들이 김연아 선수나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데 북한은 초보적인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고생을 겪는 현실입니다. 비행기표까지도 개인이 부담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말하기 뭣스럽지만, 아무리 국가대표라 해도 당장 국제경기에 출전할 팀과 출전하지 않는 팀, 승산종목과 비승산종목이 한 식당에서 밥을 먹어도 급식 질이 현저히 차이납니다. 다 같은 선수생활하면서 차별을 받아야 하는 모욕은 둘째치고, 국가 지원이나 국내 후원같은 것은 당초에 바랄 수도 없습니다.

이승재: 네 그렇군요. 이런 환경에서 선수들 역시 운동을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겠는데요?

신용건: 북한은 체육을 예술처럼 국가의 대외적 권위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선수들이 벌어온 작은 돈마저 모두 국가 소유가 되는 사회에서 선수들은 그야말로 개인 명예에 앞서서 국위선양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세뇌된 심리로 스포츠 활동에 임하고 있어요. 정성옥 선수를 극구 내세우는 원인 역시, 못먹고 굶주린다는 북한 사람들이 어떻게 장거리를 달려 우승할 수 있었는가 하는 국제사회의 반향에 더욱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 겁니다. 국가는 여전히 건재하고 여전히 달릴 수 있다,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대외적 선전과 국내적 확신을 환기시킬 기회를 제공한 거죠. 어려운 때일 수록 국민의 심리를 흔들어서 다시 한번 결속할 기회를 얻는 차원으로 스포츠를 이용하는 겁니다. 결국 북한의 체육은 정치의 종속물로 이용되는 거죠.

이승재: 네. 세계 각국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게 운동을 왜 하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이런 대답을 합니다. 운동이 좋아서, 나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또는 승리감을 쟁취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나 자신을 위해 한다는 거죠. 그게 가장 행복하게 오래 운동하는 방법 아닐까요? 지금까지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