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조현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조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현: 네. 안녕하세요
이승재: 6.25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았습니다. 남북한은 아직도 휴전 중이지만 한국에선 지금 ‘전쟁’을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전쟁 없이 북한과 평화 통일을 이룰까를 고민한다거나 혹은 북한 인민의 인권문제를 개선하면서 북한을 발전시킬 방안에 대해서 연구하죠. 선생님, 6월 25일을 기념하는 남북한의 분위기는 많이 다르겠지요?
조현: 6.25를 대하는 남북한의 차이가 정말 큽니다. 북한은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을 전쟁 승리의 신으로 부각시키거든요. 6월 25일부터 7월 27일까지 미제반대투쟁의 날로 정하고 청년,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해 각종 행사를 진행하면서 6.25를 기념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들을 추모하고, 평화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유엔군 용사들을 기리는 행사를 합니다. 저도 낙동강 쪽에 가서 그런 행사에 몇 번 참가해 봤는데 행사에서 연설한 사람들은 “다시는 민족상잔의 아픔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교육합니다. 같은 6.25인데 남북한이 이렇게 다릅니다. 정말 많이 놀랐습니다.
이승재: 그렇습니다. 한국 뿐만 아니라 그 어느 세상에서도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이 없어야 하겠죠.
조현: 북한 당국은 6.25 전쟁을 미국과 남조선 정부가 일으킨 걸로 교육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와서 보니, 이는 북한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일어났고 정말 많은 민간인들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사실 이산가족을 볼 때마다 제일 마음이 아파요. 물론 저도 북한에 가족이 있지만, 전쟁 시기에 헤어진 이산가족들이 서로 전화나 편지조차 전달 못하고 있는 것은 지구촌 최악의 야만적인 아픔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재: 맞습니다.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들 상당수가 이미 돌아가셨거나 생이 얼마 안 남은 분들인데요. 속히 가족들을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해마다 6월25일이 되면 한국정부나 한국의 지방자치단체들은 6.25 기념행사를 열어 참전용사들과 유족들을 모시고 위로하는 시간을 갖고요. 매년,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던 참전용사들을 찾아내 새롭게 훈장을 수여한다던가 국가유공자로 모시는 등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선 전쟁 영웅에 대한 대접이 꽤 후하죠?
조현: 대접이 후하다는 건 어떤 기준으로 말하느냐가 중요해요. 물론 북한도 전쟁에 참가해서 공로를 세운 사람은 공화국 영웅으로 대접을 하고요. 영예전상자요, 영예군인이요 하면서 훈장은 되게 많이 주거든요. 그런데 이분들이 몸도 아프고 부상도, 병도 있는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도록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이런데다 과거 전쟁 노병들이 지금은 다 김일성의 업적을 치하하는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동원되고 있습니다. 열병식에서 보시다시피 70~80대의 노인들이 아들, 손자 같은 김정은한테 예의를 표하게 한 걸 보면서 저는 정말 말세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승재: 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네요. 북한은 그래도 전쟁 참가한 군인들에겐 최고의 예우를 하는 것으로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군요.
조현: 또 북한에서는 전쟁시기 희생된 사람들을 이름도 새기지 않고 그냥 묘에다 합장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다가 별 하나 그려놓고 “조국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싸운 익명전사”라고 써놨어요. 그 묘에 자기 자식이나 아버지가 묻혀 있어 유해를 받지 못하더라도 유가족들이 정부에다 말도 한마디 못해요. 그런데 남한의 전쟁용사들은 북한에 비해 엄청난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국가유공자가 되면 다양한 혜택을 얻을 수 있어요. 세금이 감면되고, 병원 진료도 거의 무료고, 국가에서 집을 아주 저렴한 값으로 임대해 주기도 하고, 자녀들은 학비 혜택을 받고, 더러 대학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한에 와서 전쟁기념관에 가봤는데, 거긴 전쟁시기 희생된 사람들 이름이 쫙 적혀 있지 않습니까?
이승재: 저도 여러번 가봤는데요. 한국뿐 아니라 미국, 영국 등 6.25전쟁에 참가한 유엔군 참전용사들과 희생자들이, 신원이 파악된 사람들은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조현: 그거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어요. 특히 길에서 전쟁유공자 찾는다고 신고하라는 글을 최근에도 봤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정말 대한민국이 전쟁유공자에 대한 대접을 진짜 잘하고 있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전쟁시기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간 엘리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분들이 당시엔 가난하고 헐벗고 공부도 못하던 사람들이었지만 전쟁 때 남한으로 들어간 이후 너무 잘 돼가지고 고향으로 금의환향해서 북한 사회에 상당한 기여를 했거든요.
이승재: 전쟁 때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 중에 성공해서 북한을 방문한 분들이 있었단 얘긴데요. 금의환향하면, 저나 청취자 여러분에게 딱 떠오르는 이름이 아마도 북한이 고향이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일 것 같습니다. 1998년 소떼 1000여 마리를 몰고 방북한 일을 모르는 분들은 거의 없을 텐데요. 이분처럼 대부호는 아니더라도, 북한 외부 세계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해서 북한 사회에 영향을 끼친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한국 국적으로 북한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외국 여권을 가진 분들은 북한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조현: 네. 제가 살던 평안남도 지역에도 전쟁시기 미군과 함께 남한으로 간 이후 성공해서 다시 북한에 방문한 분들이 있습니다. 음, 이분의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이분 아들이 평성에 있어요. 유복자로 태어나 농사를 짓던 분인데 저의 형님 뻘 되고 같은 동네에 살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전쟁 때 부상당한 미군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함께 남쪽으로 후퇴를 했어요. 그러다가 폭격에 소달구지가 마사지고 소가 죽으면서, 지게를 하나 얻어서 거기 미군장교를 태워서 부산까지 걸어갔다고 해요. 이때 그 미군장교가 “한국엔 지금 전쟁도 있고 힘드니까 나와 함께 미국에 가자. 가면 공부도 시켜주겠다” 이래가지고, 이분이 미국에 가서 의사공부도 하고 병원도 차리고, 기독교 목사 공부까지 해서 목사가 됐답니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경에 이 분이 미국 국적자가 되어 고향에 방문해서 엄청난 기부를 했습니다. 평성지역에 아주 큰 시 병원이 있는데요. 이 평성시병원에 결핵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 병원과 북한 결핵예방원에 일체 설비들을 다 기부했다고 해요. 결국 북한의 결핵환자를 줄이는데 크게 기여했고요. 이분이 원래 캐나다와 중국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있는 병원을 통해서 결핵약품, 간염치료 약품들을 계속 북한에 보내와서 평성 지역사람들은 이 분이 보낸 약 가지고 엄청나게 도움을 받았거든요. 이 분이 전쟁시기, 고향에 두고 간 부인과 아들이 어렵게 사는 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아파서 자기 가족들에게 돈도 보내주어서 그들도 부자가 되었는데, 이 가족은 그 돈 가지고 자기네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동네에 공원도 만들어 주고 여기저기 기부도 많이 해서 정말 지역사회에 많은 영향을 전했습니다. 이분이 대단한 이유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미국 대학을 졸업해 의사가 됐고 돈 벌어 성공한 것도 물론 있겠지만,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번 돈을 가지고 다시 자기가 살던 북쪽을 잊지 않고 북한 사회의 지역사회 발전에 엄청나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분들이 정말 엘리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승재: 전쟁은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과 가족을 억지로 떠나게 하는 아픔을 겪게 했습니다. 이것하나로도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충분하죠. <남북 엘리트의 역설> 벌써 마무리할 시간이 됐는데요.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고향과 민족을 살리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사람들, 다음 시간에도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