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조현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조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현: 네. 안녕하세요.
이승재: 지난주에 이어 금의환향한 엘리트 이야기, 계속 들어봅니다. 6.25전쟁 때, 전쟁을 피해 북한의 고향을 떠나 남한에 온 이후, 미국이나 유럽에 건너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불철주야 일도 하면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1990년대, 2000년대에 현지 국적자가 되어 북한을 다시 방문하는데요. 단순히 방문에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번 돈과 배운 기술을 북한 사회에 전수해서 지역사회를 발전시키게 되죠. 지난주에는 평성에 상당량의 결핵약품을 보낸 의사 얘길 해주셨는데요. 오늘 소개하실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조현: 네. 그렇습니다. 평안남도 문덕에 살았던 사람도 있는데요. 이분 아들이 저와 같이 축산을 공부했어요. 이분도 전쟁시기 미군을 따라 남하했습니다. 원래는 평남 문덕군 용담리에 살았는데 그땐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거의 천민이었죠. 전쟁 중에 부상당했던 미군 장교를 업고 같이 후퇴했는데, 북한을 떠날 때부터 이분은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같이 후퇴한 미군 장교에게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청하니까 그 미군 장교가 이분을 미국으로 데려가 공부시켰대요. 거기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식품회사도 운영하고, 유통업에도 진출해 돈을 벌어서,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갖게 됐다고 합니다. 이분이 2000년대 초 북한을 다시 방문했어요. 그때 북한 식품 사업에 투자를 많이 했습니다. 특히 가금 그러니까 양계장 쪽으로 투자했는데요. 당시 북한 일반인들은 ‘오골계’라는 것은 못 먹어봤거든요. 이분이 오골계 정란을 가져오고, 알 깨는 부화기도 미국에서 좋은 것을 들여왔고요. 평남 문덕 지역에 정란장이 있거든요. 여기서 오골계를 키워서 문덕 뿐 아니라 평안남도 지역에 상당히 많이 퍼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본인이 전쟁 때 북한을 떠나면서 헤어졌던 가족들도 많았어요. 그 가족들을 다 경제적으로 도와줬고, 특히 그분 조카는 문덕군 체신소에 다녔는데요. 한국말로는 우체국이죠. 그 우체국의 전화나 설비, 기기, 이런 것들을 모두 한번에 해결해줬습니다. 그때 이분이 기증하고, 가족들에게 지원하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이 ‘우리 친척 중에 한 명이라도 미국에 갔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굉장히 부러워했습니다.
이승재: 사실 미국에 간다고 누구나 다 잘되는 건 아닙니다. 낯선 땅에서 성공하기까지, 새로운 언어를 열심히 배우고, 혹독하게 공부하고, 자는 시간 아껴가며 바닥부터 일을 배웠을 테니까요.
한국에 오신 탈북민들도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는 분들이 많잖아요? 이분들이 그런 말씀 많이 하시더라고요. “나는 정말 힘들게 돈을 버는데 받는 사람들은 돈이 그냥 흘러나오는 줄 알고 더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고요. 어쨌든 성공은 이분들이 정말 열심히 사신 결과라는 거죠.
조현: 네. 그럼요. 또 다른 사례도 있는데요. 평안남도 청남이라고 있거든요. 지금은 안주지구탄광연합기업소가 있는 지역입니다. 청천강 하류, 서해안에 있는 대규모 탄광인데요. 여기 출신 형제가 6.25 때 남한으로 피난왔다가 스위스로 갔어요. 두 형제가 처음엔 시계 조립하는 것부터 배우다 시계를 만드는 기술도 배우고, 정밀 기계 제작 기술도 배워서 스위스에서 아주 세밀한 기계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3형제인데 그중 한명인 누이동생은 전쟁 때 청남에 두고 갔어요. 북한에선 지금까지도 그때 남쪽으로 피난간 가족들을 엄청나게 핍박하거든요. 나중에 다시 만날 때 이분들이 정말 많이 울었다고 합니다. 누이동생이 이분들 보다 10년 이상은 누나처럼 보였던 겁니다.
이승재: 안타깝네요. 휴전된 지 70년이 넘었는데, 아니 전쟁을 겪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휴전이라기보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마당에 이제는 그런 차별은 없어야지요.
조현: 맞아요. 그렇게 고생한 것을 보면서 누이동생을 위해 아픔을 보상해준다고 약속했고요. 북한은 정밀기계가공기술이 거의 없거든요. 그래서 탄광장의 선반이라던가, 정밀기계설비 등을 지원해줘서, 당시 청남지구탄광연합기업소가 석탄 캐는 기계들을 만들고 고치고 했는데, 북한에서 최고의 공장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습니다. 이분들이 스위스에서 시계바늘 같은 부속품도 많이 가져왔다고 해요. 가족들은 그것을 장마당에서 팔기도 했고, 북한사회에선 생산하지 못하는 시계부속들을 그 지역에 많이 기부해서, 지역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줬습니다. 아, 제가 또 한 명 얘기할게요. 정평쪽에 살던 한 여성은 그분도 전쟁 때 나오셔서 지금은 독일에 사시는데, 그분도 자기가 살던 정평의 농장에 엄청난 지원을 해서, 정평의 농장이 지금도 전국에서 곡식 생산량 1등을 합니다. 그렇게 북한에 있던 사람들이 남한에 내려와서, 북한에 계속 살았던 사람에 비해서, 또 남한에서 북한으로 올라갔던 사람들에 비해서, 사회적 공헌을 많이 하는 걸 보고 저도 그랬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그 영향력을 부러워했습니다.
이승재: 듣기만 해도 저도 기쁘네요. 이분들은 힘든 시대를 사셨지만 자신에게 허락된 시대와 환경, 기회를 최대한 잘 이용하신 것 같고요. 피타는 노력으로 이젠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른바 엘리트가 되셨는데요. 이분들이 전쟁 이후 북한에 계속 계셨더라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사셨겠죠?
조현: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북한에 있었더라면 결코 성공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생존 자체도 위험했을 겁니다. 사실 이들이 북한에서 고향을 버리고 가게 된 이유는, 북한 정부가 해방 이후부터 “이들이 계급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땅 좀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핍박하고 내쫓고 그렇기 때문에 다 넘어온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더 넓은 미국이나 유럽 쪽에 가서 성공했으니 정말 잘 됐죠. 제가 이분들을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들어가기 힘들다는 미국 대학을 졸업하고, 타국에서 회사 차려서 돈도 잘 벌고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자기가 노력을 해서 벌었던 돈과 기술을 다시 가져와 북한 지역의 발전에도 기여하고, 사회발전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이승재: 네. 게다가 이분들이 북한을 방문한 시기는 고난의 행군 직후라 그 영향력이 상당했겠죠. 북한의 엘리트는 ‘간부’라고 하잖아요. 요즘 보면 그 생명이 오래 가진 않는 것 같아요. 한 탈북민은 “북한에선 지위가 오를수록 점점 더 처형길로 간다” 이런 표현도 하시던데요. 한때는 인정받더라도 얼마 지나면 비난을 받는 세상, 하지만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분들은 북한을 다시 방문한지 거의 20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선생님 기억 속에 훌륭한 엘리트로 남아있네요.
조현: 그 이유는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호해 주면서 좋아해 주는, 민주적인 그 제도 때문이죠. 또 부자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사회에 환원할 수 있어요. 강제로 국가에 바치는 게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으로 환원하고, 기술을 배운 사람들은 기술로 보답할 수 있는 민주제도는 사람들이 계속 성공을 이어갈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승재: 네. 전쟁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단 몇 번의 북한 방문으로도 큰 변화를 이끈 이들, 이들을 본 사람들, 이들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에겐 북한 사회에 영향력을 끼친 진짜 엘리트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사회에 환원했고, 그것은 또 다른 누군가를 성장하게 했으며, 이는 새로운 발전의 기회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발전과 번영을 꿈꾸는 북한 사회라면, 왜 사람들이 이들을 오랫동안 기억하는지 주목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