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조현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조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현:네. 안녕하십니까.
이승재: 선생님이 "남북한 외교관은 겉으로 보면 모두 국가를 위해서 일하는 듯 보이지만 남한은 국가,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 북한은 오로지 김씨 일가 정권을 위해서만 일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최근 들어 북한 외교관들의 탈북이 늘고 있습니다. 이어 그들의 증언을 통해 북한의 민낯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죠.
조현: 네. 북한 외교관 출신으로 한국 국회의원이 된 태영호 씨가 한국에서 출판한 책 제목이 '3층 서기실의 암호'입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죠. 또 2019년 가족과 함께 탈북한 류현우 전 쿠웨이트 대사대리는 북한에 12만 명 이상의 남녀와 어린아이를 수용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있다는 것과 외교관을 비롯해 페르시아만 지역에만 파견된 1만 명 이상의 외화벌이 노동자들이 번 돈이 고스란히 김씨 정권의 배를 불리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렸어요.
북한 정권의 실체를 세상에 알린
북한 외교관
이승재:그랬죠. 지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탈북 외교관들 이전에 북한의 외교관으로 가장 먼저 북한 정권의 실체와 북한 인민들이 처한 진짜 현실을 바깥 세상에 알리려던 분이 바로 이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1950년대 이상조 전 소련 대사, 북한 주민들은 과연 이분에 대해 알고 있을까요?
조현:북한에 있을 땐 저도 전혀 몰랐습니다. 8월 종파사건을 일으킨 연안파의 주역인데요. 이 사람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북한에 들어가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 상업성 부부장 등을 하다가 외교관이 됐고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전 위기에 직면한 인민군이 이상조를 중공에 보내 모택동, 주은래, 팽덕회 등과의 회담을 통해 중공군을 끌어들였다네요. 심지어 남북 휴전을 맺을 땐 북측 대표로 나왔답니다. 이상조는 1955년부터 소련주재 특명전권대사로 일했는데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을 치르게 됐다고 주장하면서 그 명분으로 위상이 높아지지 않았습니까? 김일성은 이를 발판으로 박헌영과 남로당을 무너뜨리면서 자기중심의 역사를 만들어간 건데요. 1956년 2월, 소련 대사였던 이상조는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하는 연설을 보게 됩니다. 이 연설은 김일성 체제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이상조가 8월 종파사건에 나서도록 만든 것이죠.
북한에서 모르는 사람 없는 8월 종파사건
그런데 이상조 이름은 모른다?
이승재: 8월 종파사건하면 북한에서 절대 몰라서는 안 될 사건이고 박헌영이나 최창익 등 숙청된 사람들은 모두 역사책에 나올 텐데 왜 이상조는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조현:그 사람의 이전 행적을 북한이 모두 지워버렸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마도 이상조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항일 투쟁이나 북한 정권 수립과정에서 김일성의 포장된 거짓 역사가 다 드러나기 때문이겠죠. 이상조는 자신이 숙청될 것을 직감하고 북한을 폭로하는 문서를 만들었는데요.
이승재:네. 안타깝게도 그때 공개되지는 못했죠.
조현: 네. 그 내용은 "북한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했다는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다, 김일성의 업적으로 자랑스럽게 선전되는 보천보 전투는 실제로 일본인 몇 명을 살해한 아주 작은 전투였으며 별의의가 없었다, 북한에선 스탈린보다 더한 김일성 개인숭배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었습니다. 8월 종파사건이 실패로 끝나면서 김일성은 이상조에게 소환명령을 내렸지만 이상조는 결국 소련과 잘 협상해 거기 남았습니다. 결국 북한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최고위층 외교관 망명이 된 거죠.
만약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
지금 북한은…
이승재: 8월 종파사건이 김일성을 수상으로, 최창익을 노동당 중앙위원장에, 최용권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배치하는 3인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한 거잖아요. 만약 종파사건에 성공했다면 북한은 어땠을 것 같으세요?
조현:저는 공산주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종파사건에 성공했어도 북한이 지금 한국처럼 잘 살게 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입법, 사법, 행정이 완전히 분리된 한국은 정치적으로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서로를 견제하고 감시할 기능은 충분히 주어집니다. 당시 8월 종파사건이 성공했다면 최소한 그거 하나는 좀 나았을 것 같아요.
이승재:선생님은 이상조 씨가 위인으로 보이세요? 한국전쟁도 일으키고 북한의 권력을 누리다가 해외로 도망갔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조현:권력을 오랫동안 누린 사람이 아니라 정권 초기 북한이 잘못됐음을 알고 바로잡으려 했던 사람이니까 나름 존중할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망명했다고 하나 소련에서 1990년대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 분이 1989년에 한국에 와서 6·25전쟁이 분명히 남침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강연도 했는데요. 지금 시대의 탈북 못지않은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민간인보다 외교관이 용기내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외교관이 바깥에서 한국이 어떻게 사는지 다 보는데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른 척할 수 있으며, 협력하고 싶어도 선뜻 손을 내밀 수가 있겠습니까?
남북한 외교관이 협력해 목숨 구한
유일무이한 영화 같은 이야기
이승재:하지만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더라고요. 선생님 영화 모가디슈 보셨습니까? 작년에 개봉된 한국 영화인데 해외에서 위급한 상황에서 남북한 외교관들이 협력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거든요. 이게 실제 있었던 얘기라고 하더라고요.
조현:네. 1991년에 벌어진 실제 이야기입니다. 영화 속 배경은 남북이 유엔에 가입하기 이전인데 당시 남북 모두 UN가입을 위해 투표권을 가진 아프리카 국가들과 가까워져야 했답니다. 그래서 소말리아에 남북 외교관이 체류하는데요. 때마침 반군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심지어 그 정권과 협력했던 해외 대사관들까지 침입해서 죽이고 뺏고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내용이 길지만 짧게만 말하면 결국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남한 대사관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남북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결국은 케냐까지 탈출합니다. 정작 케냐에 도착하니 각국의 상사들이 마중 나와 있어서 서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지지만요. 그러나 남북 외교관들은 서로 협력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또 협력하는 과정에서 서로가 처한 현실도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북한 외교관도 위기에 닥쳤을 때 본인들이 구해달라고 한국 대사관으로 뛰어 들어갔거든요. 자존심 내려놓고 도와달라고 손을 내민 거 아닙니까? 그게 부끄러운 행동, 비겁한 행동이 아니에요. 결국은 너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었던 행동입니다. 영화를 보면 함께 탈출하는 과정에서 북한 외교관들은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남한 외교관이 살아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분명 북한 외교관들도 자신들이 쓸모 있는 사람,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을 겁니다.
이승재: 저는 영화를 보면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된다는 게 영화 속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 속 얘기는 1991년의 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도 많은 것 같습니다.
북한 외교관들은 볼모로 잡힌 가족을 두고
왜 탈북할까?
조현:지난 시간에 외교관은 자국을 대표해 해외에 파견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한 마디로 북한 외교관은 김정은을 대신해 해외에 나가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그런 외교관들이 북한에 볼모로 잡혀 있는 가족들을 뒤로 하고 탈북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북한 당국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강경하게 억누를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하고요. 어쩌면 남과 북이 나뉘었을 때부터 잘못됐다는 판단으로 김일성과 북한 정권의 거짓을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이상조 전 소련 대사처럼 앞으로 북한 외교관의 임무는 더 엄중할 지도 모릅니다. 북한에는 외국에서 세상 문물을 경험한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사실 북한 외교관들은 뛰어난 엘리트로서 북한의 미래까지 이끌어야 할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북한 외교관들도 진짜 외교관의 업무가 무엇인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인민을 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국제사회에 북한이 처한 현실을 바로 알리고 북한을 발전시킬 수 있는 갖가지 지원들을 많이 이끌어내기를 바랍니다. 북한은 김씨 일가의 나라가 아니라 2000만 인민들의 나라이며, 북한 외교관도 북한의 2000만 인민들을 대표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승재:네 선생님 오늘 말씀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었습니다.
기자 이승재,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