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조현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조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현: 네. 안녕하십니까.
이승재: 요즘 한국 사회에서는 참 많은 강연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굳이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가지 않더라도 역사, 경제, 문화, 심지어 요리 같은 취미생활까지도 자기가 배우고 싶은 분야에 대해 주변에서 관련된 강의를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강연을 잘만 선택하면 대학에서 보다 더 수준 높은 강의를 들을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를 '강연의 사회' 이렇게도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조현: 강연의 사회는 북한이 아닐까요? 북한이야 다 노동당 강연이죠. 혁명역사, 영웅들에 대한 미담, 선전선동 등인데 그에 반해 한국은 정말 잡학다식한 강연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제가 속한 지역단체에서도 수시로 주민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강연을 열고 요즘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도 강연이 많이 열립니다. 주제는 정말 다양해요. 올바른 경제생활, 어떤 책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해주는 강연, 고전문화, 심지어 북한이 주제일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 중에도 인간 본연에 집중하는 인문학 강연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엔 법륜스님이라고 하는 분의 역사 강연을 들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신라 중심으로 통일됐는데 사실 신라는 그 3국 중에 제일 작았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중심이 될 수 있었느냐 하면, 이 통일의 시작에는 신라와 신라 옆에 붙어있던 작은 나라 '가야'의 합병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두 나라가 싸우지 않고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평화적으로 흡수해 냈기 때문이라는거죠. 이걸 남북에 적용했을 때 진정한 통일의 상승효과를 바란다면 서로 합의하고 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 만약 통일을 잘 이루면 신라가 3국을 통일한 것처럼 한국은 동아시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점, 강연자의 이런 안목이 제게 참 뜻 깊었습니다.
이승재: 역사는 늘 돌고 도는 것 같아요. 저도 역사 속에서 지금 우리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그 위기를 헤쳐나간 사례들을 들었을 때, 마치 뿌리를 찾은 듯 마음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네. 역사도 당연히 인문학에 포함되겠죠. 앞서 선생님이 인문학은 인간 본연에 집중하는 학문이라고 하셨는데 청취자 분들은 인문학이라는 말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겠어요.
조현: 북한에서 인문학이라고 말하면 소설, 희곡, 시 등의 문학과 가깝고요. 남한의 인문학은 그보다 좀 더 확장된 개념 같습니다. 사전에 보니 인문학이란 인간의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학문, 인간의 사상과 문화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 이렇게 나오는데요. 제가 볼 때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이 경험적인 접근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인문학은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인 학문, 즉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학문 같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은 물론이고 음악, 무용 등의 예술도 인문학에 포함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승재: 한 마디로 쉽게 정리하기 어려운 비실용 학문, 그러니까 살아가는 데 돈이 되는 학문은 아니지만, 세상사는 데 자양분이 되는 지혜와 지식이 담긴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말씀하신대로 한국에선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인문학 강연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북한에 계셨을 때 특별히 기억에 깊이 남았던 강연이나 인문학 관련된 책이 있었나요?
조현: 북한엔 인문학 강연은 없으니까 저도 책이나 영화를 몰래 보면서 지혜를 찾았죠. 저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이나 빨간 머리 앤이라는 소설을 좋아하는데요.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사람, 빨간 머리 앤은 고아로서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소녀를 그립니다. 그래도 그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고 미래를 차근차근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제 인생이 절망스러웠을 때, 전 이 책들을 보며 제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유가 뭔지, 내가 잘못한 것인지, 세상이 잘못한 것인지부터 천천히 고민해 봤죠. 그러다 보니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찾아낼 수 있겠더라고요. 영화 '내일이 온다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주인공이 사형선고를 받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버텨냅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복수한다는 내용인데요. 역시나 제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까요?
이승재: 그렇군요. 인문학은 다양한 학문을 아우르는데, 영화 같은 대중예술이 인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고 접근하기 쉬운 부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 하니까 생각났는데 저는 한국에서 유명한 영화번역가 이미도 님의 인문학 강연을 들은 적이 있어요. 영화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강연이었는데 여기서 그분의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더라고요. "영화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훔치라" 그 후로는 영화를 그냥 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주인공들의 작은 행동, 대사마다 "왜?" 이런 의문을 갖고 생각하며 보니까 확실히 깨닫는 부분도 있고 이해의 폭도 넓어지더라고요.
조현: 북한에서 이런 관점들을 모르고 영화를 봤을 때도 너무 좋았는데 한국에서 영화나 책을 잘 설명해주고 분석해주는 인문학 강연들, 인문학적 비평들을 보고 작품을 새롭게 보는 안목을 갖게 됐습니다. 요즘 북한에서도 유명한 '오징어게임'을 예로 들어보면요. 돈 많은 사람이 어마어마한 돈을 걸고 게임대회를 여는데, 여기 참가한 사람들이 경쟁에 경쟁을 거듭해서,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은 일확천금을 얻고 중간 중간 탈락한 사람들은 잔인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잘못되어가는 것을 깨닫고, 돈이 아닌 인간 중심의 가치를 회복하며,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존중하고,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역설이라네요. 그래서 인문학적 소양과 안목이 꼭 가졌을 때만이 그 뜻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같아요. 그리고 인문학의 장점을 또 하나 말할 수 있는데요. 인문학은 각종 사회현상들을 자기만의 시각이 아닌, 다양한 시각으로 보게 한다는 겁니다. 저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처음 왔을 때 한국 사회를 잘 몰랐죠. 그저 한국 사람들이 북한보다 몇 배는 더 잘 사는데 뭐 그리 힘들다고 말할까, 이렇게 생각했는데요. 이런 인문학 강연들을 통해 이 사회의 다양한 아픔들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 스스로도 그들이 갖지 못한 제 장점을 깨닫게 되고, 내가 이 사회의 어떤 부분에선 필요한 존재가 되겠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승재: 선생님께도 인문학이 굉장한 영향을 미쳤군요. 그런데 한국 사회의 이러한 인문학 열풍이 오래 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사람들이 인문학에 그렇게 집중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요. 우스갯소리로 저 역시도 "대한민국 남자는 이과다, 책보다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이런 말을 하고 다니거든요.
조현: 맞습니다. 한국이 놀랍도록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잖아요. 인문학은 돈벌이가 안 된다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청년들은 고시에 전념하거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을 여전히 최상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을 경시하면, 사회가 겉으로 화려해 보여도 내적으론 병이 듭니다. 결국 사람이 생각하는 힘을 못 기르면 생각 없는 기계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사람을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니까,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하니까, 그런 면에서 저는 한국의 인문학자들이 시대에 큰 영향과 울림을 주는 엘리트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도 이런 인문학이 확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인민들의 생각할 자유와 권리를 70년 동안 북한이 막아버렸잖아요. 결국 지성인들이 사라지고 권력계층은 인민을 노동당의 생각으로 세뇌시키며 그들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그게 바로 북한, 아니 독재국가의 똑같은 수법이죠.
이승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이 빠른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목적으로 한 탓에 그간 인문학은 뒷전으로 밀려있었는데요. 그로 인해 생기는 병폐들은 인간의 삶과 목적, 존재이유마저 흔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알았다면 해결할 방법이야 찾아내면 되겠죠. 인문학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사람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문학자들의 이야기가 다음시간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었습니다.
기자 이승재,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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