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엘리트의 역설] 만화가가 만들어낸 ‘의미 있는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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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북 엘리트의 역설> 이승재입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는 소수의 특수계층, 하지만 그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 바로 엘리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은 탈북민 조현 선생과 함께합니다.

이승재: 조현 선생님 안녕하세요.

조현: 네. 안녕하십니까.

이승재: 우리가 지난주에 한국의 웹툰에 대해 이야기 해봤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만화가가 이렇게 인정받는 세상이 오리라곤 생각 못했어요.

조현: 네. 웹툰은 인터넷을 뜻하는 웹이라는 말과 만화를 뜻하는 영단어 카툰을 합친 말인데요. 한국 만화 시장의 80%를 이제는 책이 아닌 웹툰이 차지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만화와 웹툰을 거의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은 창작의 자유가 있어서 웹툰의 주제도 정말 다양합니다. 사회비판, 인생철학, 미래에 대한 예견까지 주제나 내용도 영화나 소설 못지않게 깊이가 있어요. 한국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력과 표현법이 웹툰을 세계에서 인정받게 합니다.

이승재: 그래서 그런지 카카오나 네이버같은 한국 대형 사이트엔 웹툰 관련 월간 방문자만도 전 세계로부터 수천만이 넘는다고 하네요.

조현: 맞습니다. 웹툰을 원작으로 만든 한국 드라마만 해도 2020년 기준으로 200편이 넘는다네요. '구해줘, 신과 함께, 경이로운 소문, 구르미 그린 달빛' 등 북한에서도 인기 있던 작품들이 다 여기 포함됩니다. 그러다 보니 웹툰이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 전파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어요. 최근 한국의 문화체육부 해외문화홍보원은 웹툰의 인기가 세계적으로 치솟고 있으니, 한국 웹툰 작가 12명과 함께 2022년 대한민국 해외홍보달력을 제작했습니다. 달력의 주제는 "세계인의 좋은 친구, 문화강국 대한민국"인데요. 한국 전통문화, 사계절, 한식, 의료 등의 대한민국 대표 이미지를 웹툰으로 담아냈습니다. 이렇게 웹툰을 통해 세계는 자연스럽게 한국에 젖어들게 된 거죠.

이승재: 한국의 웹툰 작가들은 그림은 물론이고 전체적인 구성과 이야기도 한국식으로 풀어내면서 그 독창성에 더욱 인정받는 건데요. 북한에는 이런 창작의 자유는 없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실력가가 정말 많다는 사실,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졌죠. 제가 어릴 때 포카혼타스라는, 미국 월트디즈니사에서 만든 만화영화를 봤는데요. 당시 미국 만화영화는 모두 서양 인물이 주인공이었거든요. 그런데 '포카혼타스'의 주인공은 얼굴과 풍경이 보통의 디즈니 만화와는 다르게 상당히 동양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알고 보니 월트디즈니사가 북한에 하청을 준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조현: 저도 탈북하고 나와서 알았어요. 미국 월트디즈니사는 세계에서 제일 거대한 만화영화 기업인데요. 북한 분들은 모르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월트디즈니사는 우리가 봤음직한 수많은 작품들,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인어공주, 겨울왕국' 등을 제작한 회사입니다. 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그린 월트디즈니사 작품은 '포카혼타스와 라이온 킹'이 대표적일 것 같습니다. 두 작품 다 1990년대에 만들어졌는데 그때 이미 4.26아동영화촬영소는 외국의 하청을 받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4.26은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70개 이상의 서구 회사 및 TV방송업계의 하청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북한 외화벌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곳이죠. 그래서 지난 12월 10일,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반인권행위에 대한 대북제재로 이 4.26아동영화촬영소를 명단에 올렸어요. 북한은 이 만화제작자들을 중국에 불법으로 취업시켰고 거기서 얻은 외화를 갈취했는데, 이들과 관계된 중국 업체들도 제재 대상이 됐습니다. 사실 4.26아동영화촬영소는 북한 사람들에겐 꿈의 직장이라고 하는데요. 만약 외국인들이 같은 일을 하면 수천 배는 더 법니다. 북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한 만큼 그 수고가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일을 못하게 되면 이 훌륭한 인재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 그 가족들이 얻는 배급이 다 끊길 텐데 막막하고 답답하기만 하네요.

이승재: 안타깝네요. 해외에서 입증된 실력만큼 자국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실력발휘를 다 하지 못하는 것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대접은 그렇다 쳐도 북한주민들은 이분들이 그린 해외 유명 만화들을 직접 볼 수 있나요?

조현: 다는 아니어도 많이 봤을 것 같아요. 만화는 좀 열려 있습니다. 저도 만수대 통로를 통해 '미녀와 야수, 백설공주, 백조의 호수, 신데렐라, 톰과 제리' 등을 봤어요. 물론 월트디즈니사의 만화도 있고 아닌 것도 있습니다. 물론 북한만화가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를 겁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탈북민 만화가 중에 4.26아동영화촬영소에서 일했던 최성국 씨라고 있는데요. 이분 말이 "북한이 만화산업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월트디즈니사의 작품을 항상 연구하며 기술을 연마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분은 한국에 와서 북한 정권의 거짓과 인민폭압의 실태를 알리는 만화들을 만들었는데 그 중에 '로동심문'이 유명합니다. '로동신문'이 아니라 '심문'입니다. 북한이 로동신문을 통해서 사람들을 선동한다는 걸 비난하면서 죄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심문하는 걸 꼬집는, 일종의 언어유희죠. 최성국 씨는 자기가 하고 싶은 작품을 만들며 원하는 삶을 삽니다.

이승재: 최성국 씨의 만화를 저도 많이 봤는데요. 어떤 보도자료나 책보다도 만화가 주는 영향력이 훨씬 빠른 것 같습니다. 최성국 씨는 북한에서 월트디즈니사의 만화를 그린 건데요. 한국이나 미국, 세계 청년들 중엔 월트디즈니사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만화가가 정말 많을 겁니다. 물론 거기서 일한다고 해서, 또 일했다고 해서 그게 다 성공을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요. 제 생각엔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서 충분한 명예나 자랑할 만한 경험, 인정받을만한 이력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북한의 만화 그리는 분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것 같은데요?

조현: 정말 그렇죠.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인재들인데 북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묻혀버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결국 이들을 이용해 북한 정권은 자기들 배불리기만 한 거잖아요. 저는 한국에서 똑같은 재능을 가진 인재 만화가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을 봤습니다. 김상진 씨라고 지금은 60대가 된 분인데요. 이분이 원래 빨간색과 초록색을 구분 못하는 색맹이랍니다. 색이 중요한 광고 디자인 쪽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많은 난관 끝에 색맹이란 사실이 상대적으로 덜 영향을 끼치는 만화 그리는 일을 시작했다네요. 한국 만화회사와 캐나다 소규모 TV만화 회사에서 일하면서 미국 주류의 만화기법을 배웠고 이렇게 수년 동안 자신이 그린 작품을 1995년에 미국 월트디즈니사에 보냈더니 바로 채용됐답니다. 디즈니사에 처음 입사한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터, 만화 속에서 등장인물의 움직임이나 표정을 그리는 사람이 된 거죠. 그렇게 20년 동안 디즈니사에서 그림을 그렸고 수많은 만화 인물들의 자연스럽고 다양한 표정이 이분의 손끝에서 탄생했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겨울왕국>의 주인공 두 자매 엘사와 안나를 탄생시킨 분이 바로 이분이라네요. 지금 이분은 다시 한국에 돌아와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같은 재능이 이렇게 두 체제에서 다른 삶을 삽니다. 이거야 말로 남북 엘리트의 역설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김상진 씨가 아니더라도 한국에 이런 만화 그리는 분들이 많은데요. 한국 출신의 만화가들이 많아지니까 이들이 세계에서 점점 더 의미 있는 변화도 만들어냅니다. 이제까지 서양인이 영웅이고 주인공이었던 유명 만화들이 동양인이 주인공이 되고 영웅이 되어가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등,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현상과 사람들의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이건 한국만의 엘리트가 아니라 동양의 엘리트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승재: 그렇습니다. 서양 중심의 세계 흐름 속에 그동안 동양인은 비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세계에서 동양인의 우수성을 주목하고 이들의 문화와 사상을 배우려고 하는 시대가 됐죠. 여기엔 여러 계층, 여러 직업,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이렇게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역할도 굉장히 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중엔 이름 없이 묵묵히 그림을 그렸던 북한 만화가들이 있었다는 점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남북 엘리트의 역설> 청취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022년 새해에도 더욱 유익한 내용으로 여러분들을 찾아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기자 이승재, 에디터 이예진,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