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노벨문학상 후보 수차례 거론된 시인 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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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남한문학의 해외진출이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해외에 소개된 2000여종의 남한 문학작품들 중 상당수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출간되었고, 그 중 현지 언론과 지식인들 사이에 호평을 받은 작품도 많습니다. RFA 초대석, 오늘은 지난달 초 미국 동부에서 열린 세계 시축제와 여러 미국대학에서 남북문학에 대한 강연을 한 남한의 저명한 시인 고은씨를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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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씨는 승려출신으로 동양적이고 불교적인 시 세계와 민주화 운동경력으로 남한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씨의 주요작품으로는 시집 ‘만인보’ ‘백두산’ 등이 있고, 소설로는 ‘화엄경’ 등이 있습니다.

지난 1990년대부터 열정적으로 대외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이번에 미국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고은: 이번에 온 것은 반드시 하버드대학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구요, 뉴저지에 있는 커다란 시축제가 있었어요. 랏지 포에트리 페스티벌이라구요. 전 미국에서 2만여 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대규모 행사입니다. 거의 일주일 가깝게 시를 주제로 여러 가지 행사를 합니다. 시를 가지고 토론도 하고, 특정주제를 놓고 이야기합니다. 주무대에는 한 2,000석이 마련돼 있습니다. 거기서 시 낭독을 했습니다. 미국 청중들하고 아주 호흡을 일치해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 뒤, 워싱턴 대학으로 갔어요. 거기서 강연과 시낭독을 하고 그런 후에 하버드대학교에 온 것입니다. 하바드 대학에 와서는 ‘두개의 문학의 만남’, 다시 말하면 남과 북의 문학이 이제는 만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이야기했습니다.

하버드 대학교 강연에 참석한 미국청중들의 반응은 어떻든가요?

고은: 가령 ‘낯선 문학에 대해서, 낯선 체재에서 산 언어에 대해서 어떻게 둘이 만나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 대한 질문이 있었죠. 그런데 이런 갈등은 우리가 만나야 되고 이런 갈등은 피해서는 안 되고, 이 갈등을 껴안고 나가면서 이질성과 함께 공통성이 많기 때문에 공통성 쪽을 자꾸 지향하다보면 이질성도 따라오면서 소화가 될 것이라는 미래의 희망, 그런 것들을 알려드렸습니다.

지난 2000년에는 남과 북의 작가 300여명이 처음으로 만나 대규모 문학축제를 벌이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이 축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는데요, 그 이후 진전된 성과가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고은: 분단 60년 동안 남쪽과 북쪽의 언어가 서로 달라졌지 않습니까? 체제에 의해서요. 그래서 이대로 두었다가는 우리 민족의 언어가 전혀 이상하게 갈라지고 변질될 것 같다. 그래서 이것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양쪽의 언어학자들이 만났어요. 그때 나 같은 시인도 참가하고요.

그래서 내가 남쪽의 편찬위원회 이사장입니다. 북쪽의 편찬위원과 둘이 만나서 남북 공동으로 한국어 사전을 만드는 것이죠. 지금 상당한 부분 진행이 됐어요. 올 정월부터 시작해가지고요. 벌써 기역, 니은, 디귿, 리을 이 정도까지 갔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남쪽의 말과 북쪽의 말, 또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민족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말들을 다 우리가 다 발굴하고 채집해서, 또 서로 의논해서 이것을 올릴까 말까 해가지구, 삼십만 이상 단어를 거기다 올립니다. 이렇게 되면, 최초로 우리민족의 언어를 결집하는 거죠. 이제까지 역사상 없었던 일이죠.

최근 몇 년 동안 주요외신들은 고은 시인을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해왔습니다. 본인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고은: 나의 시 작품은 시와 소설을 통틀어서 15개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됐습니다. 그리고 또 영어로 번역된 작품은 10여개가 되지요. 미국을 포함해서요. 미국에서도 많이 판매되고 있구요. 3판 찍은 것도 있고, 몇 천부씩 나간 것도 있구요. 그래서 독자가 많은 편이죠. 제가 뭐 어떤 상에 대한 수상후보가 된것은 나 자신은 잘 모르죠. 하지만 AP통신이나 로이터 통신, 이런 통신을 통해서 2002년부터 내내 늘 이맘때쯤 되면은 신문에 나고 통신이 전하는 바가 있고, 심지어는 도박사도 나와서 점치고, 이런 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정말 그런 사실에 대해 무지합니다.

시인께서는 10년간 출가한 적은 있지만, 사실 종교인이라기보다는 민주투사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는 평이 있습니다. 1970년대는 민주화 운동, 또 80년대 이후에는 통일운동에 관여하셨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올해 73살이신데요,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주시죠.

고은: 세계 각처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문제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완벽한 해답은 없습니다. 늘 그 문제를 추구하고,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이러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전체풍경인데, 나 자신도 이전에는 예술만이 오직 내 살길이라고 살다가, 70년대 이후 현실을 발견하고, 또 민족현실, 그리고 세계의 흐름 이런 것과 만나면서, 거기에 있는 모순이나 이런 것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현실에 관여하기 시작했죠. 여러 친구들과 더불어서요.

그래서 몇 십 년 동안 한국의 인권문제, 민주화 문제, 또 분단을 넘어서서 통일로 가야 되는 이런 문제, 이런데 깊이 관여해서 세월을 보낸 것은 사실이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고, 그렇지만 지금 한국으로서는 옛날에 꿈꾸던 일들이 일정하게 달성이 돼서, 사실 요즘은 제가 맨 앞에 서지 않아도 여러 사람들이 맨 앞에 서서 잘들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여생을 내가 그동안 다하지 못한 문학을 더 성실하게 하고, 그렇게 눈을 감을 생각입니다. 나는 내 몸의 길이만큼 분량이 많은 전집의 글을 썼습니다마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통해서 좀 더 진지한 문학의 단계를 세상에 남기고 싶습니다.

워싱턴-장명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