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에서 숨은 실세로 꼽히다가 하루아침에 처형된 사람들이 너무 많죠. 그중 대표적 인물이 2011년 1월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진 류경 보위부 부부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는 2010년 12월 한국에 김정일의 특사로 파견돼 왔다가 돌아간 뒤, 한 달쯤 지나 처형됐습니다. 당시 한국 언론은 그가 간첩죄로 처형됐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설명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대남 특사까지 올 정도면 북한 정권을 위해 많은 공로를 세웠을 것인데 간첩이라면 그토록 충성을 다 할 수 있었을까요. 류경 처형의 원인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죠. 그가 왜 처형됐는지 내막을 아는 사람이 탈북해 와서 자서전을 냈는데 거기에 류경 처형의 내막이 언급돼 있습니다.
류경 부부장은 북에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고 당시 류경의 여독을 청산한다면서 각 지방 보위부에서도 고위 간부들이 많이 처형됐기에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류경이 왜 죽게 됐는지를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자서전을 낸 탈북민은 국가보위부 반탐처장 운전기사를 10년 동안 지낸 사람인데 반탐처에 있을 때 류경과 술도 마시는 등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류경 처형 이유를 잘 알게 됐는데 류경이 죽은 이유는 특사로 한국에 파견됐다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평양에 돌아가 함께 파견됐던 대표단과 함께 짜고 마치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보고서를 작성해 김정일에게 올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표단 단원 중 한 명이 상부에 사실을 이실직고했고 자신이 속았다고 분노한 김정일이 류경을 처형했다는 것입니다.
류경이 파견됐었던 상황에 대해 이명박 전 대통령은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을 통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5일 북측 보위부 고위 인사는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다.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 당시 북측 인사는 서울에 와서 나를 만날 것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북측 인사는 ‘장군님 메시지를 가지고 왔는데 이 대통령이 왜 우리를 만나지 않느냐’고 거칠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확인한 바로는 그들이 김정일의 서한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고 나는 그들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과 국가보위부 출신 탈북민의 설명을 종합하면 류경이 왜 처형됐는지 윤곽이 그려집니다. 당시 류경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는 김정일의 밀명을 받고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자 류경은 자의적으로 하루 더 머물며 성과를 만들려 했고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습니다. 평양에 돌아간 류경은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질책이 두려워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고 남쪽에서 긍정적인 답변도 받았다”는 식의 거짓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추정컨대 남쪽에 한 번 더 내려와 거짓말을 만회하려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만회를 하기 전에 한국에 같이 왔던 부하 4명 중 한 명이 배반해 화를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류경은 왜 그런 무리수를 뒀을까요. 류경이 걸어온 삶을 들여다보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최고의 전문가였고 이런 점 때문에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2중 공화국영웅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류경은 1990년대 후반 보위부 해외반탐처에서 중국 담당 지도원을 지냈는데 어느 날 해외에 안전대표로 발령 났습니다. 북한 대사관엔 안전대표라는 직책이 있는데 이는 보위부 사람이 맡는 자리입니다. 안전대표 선발 면담 과정에 그의 명석함을 알게 된 상부에선 해외에 파견하는 대신 보위부 내부에서 승진 시켜 각종 임무를 맡겼는데 그때부터 류경은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2000년 초반 류경은 평양 서산호텔에서 일본 간첩을 체포했고 그를 돌려보내는 대신 일본 정부에서 300만 달러를 받아냈다고 합니다. 간첩도 잡고 300만 달러도 공짜로 얻게 되니 김정일이 그를 눈여겨보게 되겠죠.
류경은 2000년 8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방북도 성사시켰는데 김정일이 일본에서 사람들을 납치했다고 시인하는 바람에 회담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건 김정일의 실패이고 회담을 성사시킨 류경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 여기자 2명을 납치해 2009년 8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성사시킨 것도 류경의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 류경이 어려운 일들을 연거푸 성공시키자 김정일의 신임은 더욱 커졌고 류경은 보위부 이인자로 승진했습니다. 그의 집과 사무실엔 김정일의 직통 전화가 개설됐는데 직통전화가 집에도 개설됐다는 것은 엄청난 신임을 받는다는 징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회담 성사로 승승장구해 온 류경이니 남쪽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편 김정일은 가장 믿었던 심복에게 배반당해 분노가 몇 배로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류경은 처형됐고 가족은 모두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류경과 함께 남쪽에 내려온 사람 중 밀고한 사람을 빼곤 나머지 사람들의 운명도 같았을 것입니다. 분노한 김정일은 보위부에 “류경 여독을 청산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류경의 심복으로 꼽힌 수십 명이 또 영문도 모르고 처형됐고 가족은 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북에선 영문도 모르고 줄을 잘못 섰다 처형되고 멸족되는 이런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습니다.
자기를 속였다고 평생 충성을 다했던 부하를 죽이고 온 가족을 멸족시키는 것은 악명 높은 마피아 사회에서도 하지 않는 짓입니다. 거기에 부하와 가까웠다고 또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북한 김씨 일가나 가능한 끔찍한 살육이죠. 류경은 극악한 마피아 두목보다 몇십 배 잔인한 폭군을 섬겼던 대가를 받은 셈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주성하, 에디터:오중석,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