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차 이산가족 2차 상봉 소식을 보면서, 남다른 아픔을 안고 있는 저로서는 조금은 먹먹해지기도 했습니다. 며칠 동안 텔레비전 앞에서 떠날 줄을 몰랐고 고향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이 짠했습니다. 저는 그들 못지않은 아픔을 함께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텔레비전을 보니 갖가지 사연들이 넘쳤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아빠와 헤어져 유복자로 자라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린 70이 되어 처음으로 불러 보는 아버지란 말, 그냥 가족을 부둥켜 않은 채 눈물만 흘리는 모습 등 이산가족의 만남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이제는 부모와 자식의 만남보다도 대다수가 자매, 삼촌과 조카, 며느리 손녀 등이 많았습니다. 서로 헤어질 때 갓난아기였을 텐데 인제는 허리가 굽었고, 기저귀 차던 딸이 칠순이 되었는데 정말 얼굴은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실향민들도 이제는 나이가 들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고 그 후손들이 부모님들의, 살아생전 고향을 가보고 싶었던 꿈과 희망 그리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었던 소원을 이루어 주려고 신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더 짠해지기도 하고 그 아픔의 현실이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아픔은 주변사람의 아픔이 아니라 나의 아픔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늘 소리 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너무도 야속 했었죠.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텔레비전에서는 북한에 살고 있는 80대의 한 어르신이, 동생이 취직을 위해 서울로 간 뒤 연락이 끊겨 오랜 세월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눈에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나오네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현실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언제인가 누군가가 불러준 노래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고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네.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그들이 지금 고향에 있는 내 부모님 그리고 형제들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는가? 다르다면 그들은 갑자기 일어난 6,25전쟁으로 인해 남북이 갈라지고 분계선이 생기면서 서로 만날 수 없는 이산가족이 된 것이고, 저희는 전쟁도 아닌 평화로운 시기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네요.
강제 북송으로 잠깐 친척집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7살짜리 남자 애가 “큰엄마! 중국갔다 올 때 제 발에 꼭 맞는 예쁜 운동화를 사다 주세요”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네요. 지금은 늠름한 청년이 되었지만 그 말이 아직도 제 귀에 쟁쟁히 그대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평양에서 국경 연선까지 찾아와 전화로라도 잠깐 제 목소리를 듣고 돌아갔던 언니가 이제는 관절암으로 인해 걸을 수가 없어 지팡이를 들고 겨우 아파트 출입문에 내려와 이 동생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네요. 제 어머님이 걸었던 그 길을 언니가 그 길 위에서 이제나 저제나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이거든요.
그나마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할 수 있는 실향민들이 때로는 부럽기도 합니다. 잃은 가족과 만날 수 없다는 것.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 슬픔에 대해 경험이 많은 저로서 형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너무도 긴 세월이 흘러 검은 머리 백발이 되어서야 겨우 이루어지는 상봉이건만 겨우 11시간밖에 안 되는 통제된 시간이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인지 너무도 잘 압니다.
2박 3일을 함께 밤낮을 한방에서 뒹굴며 흘러간 아픔에 대해 회포를 나누어도 끝이 없으련만, 기다린 세월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만남의 시간을 규정해 놓고 만난다는 것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기에 이산가족 상봉 이후 그 슬픔으로 인한 상실감과 죄책감으로 우울증 후유증도 생긴다고 들었습니다.
온 국민들을 떠들썩하게 하던 태풍 ‘솔릭’도 그 아무리 강한 비바람도 오랜 세월 꿈에도 그리던 남북 이산가족들의 앞에 무릎을 꿇었네요. 남과 북 이산가족 상봉도 누구의 통제와 규제,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그날과 함께 그 대열에 우리 탈북자들도 함께 서게 될 날을 기원하면서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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