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식단을 위해 가꾸는 텃밭 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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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이었습니다. 한참 꿈나라에 가 있을 시간인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고 올해 농사 준비를 위해 주차장으로 갔습니다. 미세 먼지로 인해 한 치의 앞도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상용 전등을 켜고 천천히 달렸습니다. 조수석에 앉은 저는 그야말로 두 눈을 부릅뜨다시피 열심히 앞을 살폈습니다.

아침 5시 30분에 도중에서 밭일을 도와주실 중국사람 세 분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거든요. 어느덧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니 세 분이 나란히 길목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차를 세우고 인사를 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니 하오” 모두가 오리지널 중국 사람이라 말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두 명은 산등성 교주에서 왔다고 했고 한명은 흑룡강성에서 왔다고 하네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제가 교주에서 한 3년간 살아본 경험이 있는지라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나오는 풀을 막기 위해 이랑에 비닐을 씌워 주는 일을 시켰는데, 제 집 일처럼 책임성 있고 믿음성 있게 잘해 주었습니다.

중간 중간마다 오미자 음료수와 커피, 과일도 부지런히 대접했고 조용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점심식사도 대접 했습니다. 일을 마치고 아침에 만났던 장소까지 모시고 갔습니다. 미리 인력소개소 사장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들은 내일 또 오면 안 되는 가고, 곱씹어 묻기도 했고 고맙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분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내내 제 마음은 조금 뭔가 짠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60이 넘은 나이에 고향에 있는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 남한에 와서 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그 분들을 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국적도 없는 중국에서 남의 집에서 꼬리 없는 황소가 아닌 황소처럼 일을 해야만 했던 지나간 마음 아픈 시절이 기억났습니다. 16살 딸애가 옥수수 밭 김을 매던 중 혹 아주 작은 풀을 미처 살피지 못하고 남겨 두었다고 술에 취한 주인의 호미가 날아 왔고, 한창 벼 수확을 하던 도중 힘이 들어 잠깐 허리를 펴고 쉰다고 벼 수확을 하던 낫이 공중으로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소죽을 잘못 끓였다고 무쇠 가마 솥뚜껑이 날아오기도 했습니다. 평양에서 나서 자란 어린 딸애는 덩치가 몇 배나 큰 황소가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황소 주인이 더 두렵고 무서워 불평불만 없이 황소 6마리를 끌고 물을 먹이기도 했고 매일 아침마다 냄새가 역한 소똥을 치우기도 했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생각이었지만 어린 딸애와 함께 내 땅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여름에 야산을 찾아 9,000평이나 되는 새 땅을 삽과 곡괭이로 만들었거든요.

새 땅이라 몇 년은 옥수수와 콩이 잘되었습니다. 어느덧 잘 익은 옥수수와 콩 수확으로 잠시나마 마음이 뿌듯했지만 손에는 한 푼도 쥘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에서는 농사가 뭔지도 모르고 호미와 낫 그리고 황소는 그림이나 영화에서나 보아 왔던 철부지 어린 딸애는 농사일에 얼마나 혼이 났던지, 지금도 농사일이라고 하면 두렵고 무섭다고 할 정도랍니다.

내 고향 북한 주민들은 늘 부족한 식량사정으로 생계를 위해 땅을 일구어 소 토지를 하고 농사를 열심히 하지만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저는 내 건강을 위함과 즐거움으로 하는 작은 농사인데도 때로는 팔자에 없는 농사를 한다고 투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심고 가꾼 들깨로 기름을 짜서 사랑하는 내 가족들의 식탁에 올릴 때이면 뿌듯하고 그 행복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가 없거든요.

가족들의 건강과 내 건강을 위해 농약을 주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호미와 낫을 들고 풀을 베고 김을 매줍니다. 벌써 찰옥수수도 조금 심었습니다. 이곳 남한 생활 10여 년이 지나고 보니 저 역시 이곳 남한 사람이 다 됐나 봅니다. 내 건강을 위해 운동과 함께 건강한 음식을 내 손으로 직접 심고 가꾸어 만들어 먹을 뿐만 아니라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습관이 자연스러워 지기도 합니다.

오늘은 일꾼들과 함께 한 해 농사 준비를 하면서 지나간 추억을 해 보았네요.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