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이 활짝 피는 6월입니다. 창문을 열면 만발한 빨간 장미꽃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진한 꽃 향기로 괜스레 기분이 좋아집니다. 한창 아름다운 장미꽃에 취해 있는데 눈치 없는 뻐꾹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잊지 않고 찾아와 밭갈이가 시작된다는 것을 노래 소리로 알려주거든요.
우렁찬 뻐꾹새의 노래를 들으면서 비록 농사꾼은 아니지만 밭으로 갔습니다. 벌써 들판에는 모내기가 한창이네요. 넓은 들판에는 그냥 모내는 기계 한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갈 뿐인데 기계가 지나간 뒤에는 파란볏모들이 한들한들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기계에 모를 보충하고 있는 낯익은 밭주인에게 차 창문을 열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밭에 들깨 모종을 심었습니다. 역시 뻐꾹새가 불러 주는 노래 소리가 구수하게 들려옵니다. 농사 경험이 없지만 올해에는 시험 삼아 참깨도 조금 심었습니다. 비닐을 씌워 놓은 이랑에 구멍을 뚫고 쥐눈이콩도 심었습니다. 시간은 어느덧 벌써 반나절이 지나 갔습니다. 점심을 먹고 조금 쉬고 있는데 아침에 인사를 나누었던, 논밭 사장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하시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고향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분의 고향도 바로 임진강 건너편이라고 하네요. 80이 되어 오는 그분은 잠깐 동네 마실을 왔다가 남북 3,8분계선이 갈라지면서 고향이 북한이 되었고 손을 뻗치면 금방 닿을 듯한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다시는 갈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모님은 장단초등학교 교사였고 본인은 육군 장교로 한 평생을 보냈으며 퇴직 후 다시 고향이 가까운 이곳에서 재미 삼아 건강을 위해 농사를 한다고 하네요. 그분은 제 마음을 헤아리듯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야 고향에 가 볼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합니다. 언론들에서는 금방 통일이 다 되어 가는 것처럼 말하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갈 길은 험난하고 멀다고 얘기합니다.
통일이라는 말보다 북한이 하루빨리 개혁 개방해야 한다는 표현이 더 쉽지 않을까, 라는 말로 한 마디 참견했습니다. 사실 북한에서 태어나 반생을 살아온 저는 이곳 자유민주주의 남한에서 15년을 살면서 지난 세월 상상도 못했던 인생의 새 삶을 살아온 탈북자로서 사실 북한은 나라가 아니라고 나름대로 생각해 왔거든요.
북한 독재 3대 세습이 없어지고 남북이 통일되어 내 고향 주민들도 인권유린이 없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희망과 꿈을 가지고 인간의 삶을 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번 두 번째의 남북 두정상의 만남에서 보여 주듯이 현실은 남과 북 통일이라는 말보다 하루빨리 북한을 개혁 개방해야 한다는 표현이 더 좋은 말인 듯하다고 덧붙였습니다.
북한을 개혁 개방하여 이곳 남한 기술과 자재,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노력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면 북한 주민들의 삶의 변화는 빠르게 변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탈북 하기 전 가족들과 함께 남들 모르게 조용히 그리고 자주 남조선 자본과 기술이 들어온다면 주민들은 일을 한만큼 월급을 받아도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던 말이기도 합니다. 그분 역시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하네요.
죽기 전에 한번은 고향에 가 볼 수 있다는 희망과 꿈이 이루어 질 것 같다고 합니다. 고향에 가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분의 물음에 저는 제일 먼저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보고 두 번째로 제가 살았던 고향집을 구입해 아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분은 너무도 좋은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하면서, 본인의 일처럼 기뻐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뻐꾹새의 노래 소리에 지나간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평양 제1여관에서 학생 교복을 군복으로 바꿔 입고 황해남도 재령군에 도착해 신병 훈련보다도 먼저 군복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고 논밭에서 볏모를 꽂다 말고 태어나서 처음 모내기를 해 보는 것이라 저에게는 너무도 어렵고 고된 노동이기도 했거든요.
가까운 곳 어디선가 들려오는 뻐꾹새 울음소리에 나도 모르게 볏모를 손에 든 채 허리를 펴고 평양의 하늘을 바라보며 불과 얼마 전 헤어진 부모님과 동생들의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남북한을 가로막는 철조망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고향으로 오고 가는 날도 머지 않았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