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는 주말에 폭 빠져 은근히 기다리게 되네요. 남모르게 예쁜 단장을 하고 전철을 타고 서울 중심인 종로로 부지런히 갑니다. 남한 친구들과 함께 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가방도 만들고 인형 등 갖가지 옷들과 천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고 있습니다. 인생 선배인 이곳 남북한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뭔가를 구상하며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저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추억과 인생의 즐거움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해 봅니다.
지난 주말에는 북한식 배낭과 천 가방을 만들었거든요. 한 땀 한 땀 손바느질과 전기 재봉으로 만들어 가는 내내 지난 고향에서의 마음 아팠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고난의 행군으로 인해 식량 공급이 중단된 어느 날, 우리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밥을 먹이기 위해 가늠할 수 없는 큰 배낭에 있는 물건을 가득 채워 등에 지고 식량 구입을 위해 이른 아침 일찍 평양시민들의 농촌동원 전투를 위해 생긴 임시 통근열차를 몰래 타고 황해도 황주로 떠났었습니다.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친구와 함께 목적지인 황주에 도착해 알지도 못하고 한번 가보지도 못했던 산골길을 행방없이 걷고 또 걸으며 작은 동네이든 큰 동네이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다 찾아 헤매고 다녔습니다. 저녁 통근 열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음은 조급해 지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옥수수와 수수쌀 등 80kg은 잘 되게 구입했습니다.
우선 배낭을 등에 지고 천 가방2개는 양쪽 어깨에 메고 그리고 또 하나는 앞에 졌습니다. 그날이 바로 해가 제일 길고 제일 덥다고 하는 하지 날이었거든요. 친구와 함께 아무리 부지런히 걸어도 내 몸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200m쯤 걸으면 더 갈수가 없었습니다. 손목시계를 자주 들여다보며 걷고 또 걸었지만 황주역까지는 까마득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녁 5시 통근 열차 시간을 겨우 맞추어 황주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아침과는 달리 말이 통근 열차이지 화물을 싣고 다니는 화물방통이었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거든요. 그 중에 고마운 분이 있어 제 짐을 받아 주어 생각보다 조금은 편하게 열차를 탈 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걸려 대동강 역에 도착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짐을 내렸지만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수술을 받은 지 겨우 2개월이 되었었는데 터질 듯한 아픔과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중 나온 남편 역시 너무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있던 이곳 남한 친구들이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지고 다닐 수가 있는 가고 여기저기서 물었습니다.
고향이 회령인 친구가 정말이라고 북한 사람이라면 이런 배낭을 안 져 본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배낭을 지고 몇 십리 아니 몇 백리도 걸었다는 얘기와 더불어 북한에는 버스가 없다는 점을 강조 했습니다. 아마 여기 남한 여성들 보고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행방을 다니라고 하면 이해를 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덧 붙였습니다.
그 친구는 이불을 뜯어 큰 배낭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하루는 감자를 구입해 등에 지고 집으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엉덩이를 돌로 때리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픔과 함께 뒤를 돌아보니 따라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고 하네요. 또 몇 발자국을 걷고 있는데 또 누가 엉덩이를 때리기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놀랐다고 합니다.
글쎄 배낭에 구멍이 나 있었고 감자가 떨어지면서 엉덩이를 때렸다고 하네요.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친구의 얘기를 들으면서 크게 웃었지만 당시에 그 친구가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갔거든요. 왜냐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경험을 하는 일이거든요. 재봉이 없는 북한 여성들은 손바느질로 배낭을 만들다 보니 세월이 지나면 바느질실이 삭아 끊어집니다.
이런 얘기를 듣고 있던 남한 친구는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남편 따라 이곳 남한으로 와서 처음 적응하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재봉을 배워 현재 까지 손에서 재봉을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친구들과 좋은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내내 저는 때로는 전구 알을 대고 구멍 난 양말을 밤새 꿰매 신겼고 때로는 꾸어진 교복 무릎을 꿰매 입혔고 때로는 내 옷을 뜯어 딸애의 원피스를 만들어 입혔던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조금은 쓸쓸한 마음이 들었지만도 지금은 이렇게 남한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주말이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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