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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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설 아침 하루 전날부터 조용하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늘 그러하듯이 손자 녀석들로 분주합니다. 설 명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설 세배가 시작되었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은 예쁜 봉투를 들고 방석 위에 앉았습니다. 자녀들의 설 인사와 함께 덕담하던 중, 순간 나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자녀들의 눈에서도 어느새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시련으로 중국과 북한에 이산가족이 아닌 이산가족이 되어 헤어져야만 했던 내 가족, 국경연선에 살고 있는 친척 집으로 갔던 딸을 찾아 천만리 헤매던 지난 가슴 아팠던 날들, 고향에 두고 왔던 아들을 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던 지난 세월과 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대 가족이 되어 서로 서로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고 덕담을 해 주면서 행복한 가족의 정을 만끽하는 제 모습에서 다시는 돌아오실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도 갑자기 나네요. 명절과 생일이 오면 자녀들에게서 용돈을 받고 또는 손자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이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이번 설 명절에는 더욱 크게 마음에 다가옵니다. 어린 시절 아버님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만년필을 구입해 아버지의 생일날에 선물로 드렸던 기억이 어제 일 같이 떠오르기도 했었고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얼굴은 언제나 설 명절이 훨씬 지나서야 볼 수가 있었거든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해마다 설날이 훨씬 지나서야 집에 오셨습니다. 사탕과자 등 선물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이제 겨우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되었던 어린 동생이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어 마냥 울었습니다. 아버지의 못내 서운해 어쩔 줄을 몰라 하시던 그 모습이 아직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잠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손자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받은 용돈을 각자 지갑에 넣고 있는 모습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손자들뿐만 아니라 저 역시 이번 설 명절에는 많은 용돈을 받았습니다. 지난 어린 시절 부모님들로 부터 많은 용돈과 선물을 받아 왔지만 저는 언제 한번 부모님들에게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이곳 남한에 처음 왔을 때 어머님의 건강이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을 울고 또 울었거든요.

병원에 약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지막 치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돈을 보내 주었지만 어머님은 1년도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났거든요. 어머님의 병이 마치 이 불효인 저 때문이라고 지금도 자책 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옆에 있었다면 조금 더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가셔지지가 않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제 뒤에서 소금을 뿌려주며 무사히 갔다 오라고 바래주던 어머님. 밖에서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도 문을 열고 제 이름을 불렀다던 어머님.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이 둘째와 남동생이 안 보인다고 하셨다고 하네요. 요즘 어머님의 나이 되고 보니 어머님의 그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당신들은 덜 먹고 덜 쓰면서도 자식들에게 하나라도 더 해 주고 싶고 좋은 것을 먹이고 싶어하시던 그 마음을 알 수가 있네요.

그런데 저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에게서 받는 것은 그냥 응당한 것이라고 생각 했을 뿐 보답은 커녕 언제 한 번 맛있는 음식 대접 하지 못하고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기에 요즘 사람들이 휠체어에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자주 느끼거든요.

지나간 아픈 추억을 하고 있는데 마침 국제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습니다. 평양에 있는 막내 동생이 국경으로 왔다고 합니다. 세월은 흘러 막내 동생나이도 벌써 48세가 되었습니다. 목소리조차 가물가물 기억이 잊혀져 가는 듯합니다. 그냥 눈물만 흘렸습니다.

저에게 막내 동생은 남다르거든요. 부모님이 40이 넘은 늦은 나이에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 동생이 부모님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드렸거든요. 내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까운 것이 없는 소중하고 특별한 동생입니다. 12시가 되어 저는 가족과 함께 임진각 망향제에 갔습니다. 낯익은 실향민들도 있었습니다. 고향이 무산인 실향민 김 선생님과 윤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흰색으로 된 철교를 바라보며 가족들과 함께 통일열차를 타고 저 다리를 건너 내 고향으로 갈 그날이 얼마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입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